■사례
여고 동창생인 가희, 나리, 다미는 화창한 주말 오후에 만나 영화를 보기로 했다.
하지만 보고 싶어 하는 영화가 서로 달라 선택에 애를 먹었다.
가희는 멜로물인 A영화를 보자고 주장했다. 성격이 털털하고 시원하기로 유명한 나리는 액션물인 B를 보고 싶어 했으며 다미는 코믹 영화인 C를 우겼다.
뜻을 하나로 모으는 데 실패한 셋은 다수결로 영화를 정하자고 합의했다. 종이에 각자 좋아하는 순서대로 영화 제목을 적기로 했다.
가희는 A, B, C의 순서로 적었다. 나리는 B, C, A 순서로, 다미는 C, A, B 순서로 각각 적었다.
결과를 정리해 보니 A영화를 B영화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2명이고 반대로 B영화를 A영화보다 좋아하는 사람은 1명이다. 즉, 2 대 1로 A가 B보다 우세했다. B영화와 C영화를 비교해 보니 역시 2 대 1로 B가 C를 앞섰다.
이 같은 결과가 나오자 성격이 급한 가희가 말했다.
“A영화가 B영화보다 우세하고, B영화는 C영화보다 우세하니까 더 따지지 않아도 A영화가 C영화보다 우세할 거야. 자, 우리 다함께 A영화를 보러 가자.”
이때 꼼꼼한 다미가 제동을 걸었다.
“잠깐, 그래도 좀 더 확인해 봐야지…. 어! C를 A보다 좋아하는 사람도 2명이잖아? 그러면 우리 C영화를 봐야 하는 것 아니야?”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가희가 당황하며 말했다.
셋은 머리를 맞대고 다시 살펴봤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세 사람의 입에서는 이구동성으로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이상하네” 하는 소리만 나왔다.
A를 B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고, B를 C보다 좋아하는 사람도 더 많다. 그런데도 C를 A보다 좋아하는 사람 역시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수결 투표를 했지만 가장 우세한 영화 한 편을 선택하지 못하고 빙글빙글 순환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세 사람은 이상하다는 소리를 되풀이하며 투표용지만 뚫어져라 들여다보다가 그만 영화 시작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이해
세 사람은 다수결 투표를 했지만 영화를 결정하는 데 실패했다. A가 B를 이기고, B가 C를 이기므로 우리는 당연히 A가 C를 이길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사례에서처럼 C가 A를 이길 수 있다. 일관성이 무너진 결과다.
스포츠 경기에서 X팀이 Y팀을 이기고, Y팀이 Z팀을 이겼으므로 당연히 X팀이 Z팀을 이길 테니 두 팀은 경기할 필요도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경기를 해 보면 Z팀이 X팀을 이겨서 물고 물리는 혼전이 발생하곤 한다. 스포츠 경기에 일관성이 있다면 승부가 뻔할 테니 재미없다. 일관성이 없는 게 오히려 다행이다.
운동 경기와는 달리 투표에서는 문제가 심각하다.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순서가 뚜렷하게 서 있지만 여러 사람의 생각을 투표를 통해 모으면 집단이 좋아하는 순서가 뚜렷하게 정해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투표의 역설’이라고 한다.
가족이나 교실처럼 작은 집단에서부터 지역이나 국가처럼 큰 집단에 이르기까지 구성원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우리는 흔히 민주적 방식인 투표를 활용하는데, 여기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마음을 나쁘게 먹으면 의사결정을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조작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가희가 주도권을 쥐고서 먼저 B와 C영화를 놓고 1차 투표를 하자고 제안한다. 투표 결과 B영화가 2 대 1로 이긴다. 이제 A와 B영화를 놓고 2차 투표를 하면 A가 B를 2 대 1로 누른다. 결국 가희가 원하는 A영화로 결정된다.
1차와 2차 투표에 부쳐지는 영화의 순서를 바꾸면 B나 C의 선택도 가능하다.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 케네스 애로는 최선의 선택을 항상 보장해 주는 투표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다수결 투표라고 예외가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대개 투표를 통해 집단의 의사결정을 하는데, 투표가 비합리적일 수 있다면 어떤 대안이 있을까.
의사결정을 한 명의 개인에게 위임하는 방법이 있다. 집에서는 가장에게, 국가에서는 대통령에게 전적으로 맡긴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독재의 위험이 있으며, 한 개인이 구성원의 뜻에 반하는 의사결정을 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투표를 선호한다. 한 진 수 경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경제학 박사
정리=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