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자가 회사의 경영권을 확보해 이사가 임기 중에 해임되면 대표이사와 부사장, 일반 이사에게 각각 50억 원, 30억 원, 20억 원 이상을 지급해야 한다.’
반도체 집적회로(IC) 설계 전문업체인 코스닥 기업 티엘아이는 지난달 18일 주주총회에서 이런 퇴직금 규정을 새로 포함시킨 정관을 통과시켰다. 적대적 인수합병(M&A)을 시도하는 외부 세력이 M&A 후 임원에게 지급해야 할 퇴직금 부담을 크게 늘림으로써 경영권의 안정을 노리는 ‘황금 낙하산’ 조항을 도입한 것이다. 이 회사의 지난해 매출액은 507억 원에 영업이익은 82억 원. 현금성 자산만 250억 원이 있고 차입금 의존도는 0.38%로 낮은 탄탄한 기업이다. 티엘아이 관계자는 “지배주주의 지분이 20%대로 낮은 편이어서 적대적 M&A 공격을 예방하기 위해 새 규정을 도입했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주주총회에서 이디 우수씨엔에스 오리엔탈정공 소프트맥스 에스텍파마 등 다수의 코스닥 기업이 이처럼 정관을 바꿔 경영권 방어조항을 만들었다.
○ 활발해진 중견기업의 적대적 M&A
국내의 대표적 온라인게임업체 중 하나인 코스닥 기업 웹젠은 최근 경영권을 방어하느라 큰 홍역을 치렀다. 올 초 통신장비 제조업체인 네오웨이브와 레저용품 전문업체 라이브플렉스가 손잡고 이 회사 지분 11% 정도를 확보한 뒤 적대적 M&A에 나섰던 것. 웹젠은 우리투자증권을 ‘백기사’로 내세우며 22%의 지분을 확보해 지난달 28일 주총의 표 대결에서 상대 측 이사 선임을 무산시키며 승리했다. 하지만 네오웨이브와 라이브플렉스는 경영참여 시도를 계속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불씨가 남아 있는 상태다.
중견기업인 샘표식품은 경영권 방어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 회사 지분 29%를 보유한 우리투자증권의 마르스1호 사모(私募)펀드가 공개매수를 통해 적대적 M&A를 시도하고 있다.
○ M&A 통해 성장한계 극복하겠다
중소 중견기업들이 최근 경영권에 민감해진 것은 성장의 한계를 느낀 기업들이 새로운 분야로 진출하거나 기존 사업과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며 다른 기업에 대한 M&A를 적극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은행 투자금융부 정상민 차장은 “중소기업 사장들을 만나보면 열이면 열, 다른 기업을 인수할 생각을 갖고 있다”면서 “중소기업은 제품 라이프사이클이 짧기 때문에 사업 다각화 의지가 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주주의 지분이 낮고 수익모델이 좋은 상장 중소기업은 인수자금이 적게 들고 경영권 방어 장치도 미비해 적대적 M&A의 좋은 표적이 된다. 지난해 말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코스피, 코스닥에 상장된 300개 기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중소, 벤처기업이 다수인 코스닥 기업 중 40.4%가 “경영권 위협에 대처하기 힘들다”고 답했다. 대기업이 많은 코스피 기업은 그 절반 이하인 17.5%만 같은 응답을 했다.
중소기업들이 주로 도입하는 경영권 방어 장치는 정관 변경을 통해 가능한 황금낙하산 및 ‘초다수결의제’(대표이사 등을 해임하는 데 필요한 주주의 정족수를 늘려 적대적 M&A를 예방하는 제도). 차등의결권 독약조항 등 다른 제도는 현행법상 가능하지 않다.
○ 과도한 방어는 산업 효율성 저해
샘표식품 박진선 사장은 16일 기자간담회에서 “요즘 모든 경영권 방어 논의가 대기업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며 “중소기업의 경영권 방어 장치를 정부가 마련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영권 방어 장치의 도입은 M&A의 활성화를 막아 전체 산업구조의 효율화를 저해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금융연구원 여은정 연구원은 “주식시가총액 대비 M&A 금액 비율은 영국(9.9%) 미국(6.9%) 등에 비해 한국은 2.9%에 불과하다”며 “공격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과도한 방어수단이 도입되면 소수 경영진만 보호하는 부작용이 있다”고 지적했다.
여 연구원은 “국내에서는 오너 경영이 많아 경영권 가치를 최우선시하는 데다 적대적 M&A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탓에 활성화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금융연구원에 따르면 1997년부터 2006년까지 10년간 국내에서 일어난 총 6150건의 M&A 가운데 적대적 M&A는 25건으로 0.4%에 불과했다. 그나마 성공한 적대적 M&A는 10건뿐이었다.
올 3월 주주총회에서 경영권 방어수단 도입한 코스닥 기업 및 내용 | ||
기업 | 경영권방어조항 | 내용 |
티엘아이 | 황금낙하산 | 비자발적 해임 시 대표이사에게 50억 원 지급 |
이디 | 황금낙하산 | 적대적 M&A로 해임 시 대표이사 50억 원, 이사 30억 원 지급 |
초다수결의제 | 이사 해임 시 주식 발행총수 70% 이상 찬성 필요 | |
우수씨엔에스 | 황금낙하산 | 적대적 M&A로 해임 시 대표이사 50억 원, 이사 30억 원 지급 |
오리엔탈정공 | 초다수결의제 | 이사 해임 시 주식 발행총수 70% 이상 찬성 필요 |
소프트맥스 | 초다수결의제 | 적대적 M&A로 임원 해임 시 주식 발행총수 3분의1이상 찬성 필요 |
에스텍파마 | 황금낙하산 | 적대적 M&A로 해임 시 대표이사 40억 원, 이사 30억 원 지급 |
자료:금융감독원 |
김상수 기자 s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