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 국내기업 10여곳 CB발행때 이면 계약
불법거래로 기업-IB만 ‘윈윈’… 투자자 농락
리먼브러더스 전직 임원의 주가조작 사건에 이어 국내에 진출한 또 다른 세계적인 투자은행(IB) 관계자들이 불공정거래 혐의로 금융감독 당국의 조사를 받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국내 금융계에 파장이 확대되고 있다.
특히 임직원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에 대비한 내부통제 시스템이 잘 발달돼 있다는 외국계 IB에서조차 감시에 구멍이 뚫린 것으로 나타나자 업계에서는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금융당국은 A투자은행 외에 다른 외국계 IB를 대상으로 추가 조사에 나설 방침이다.
○ 투자은행과 기업 간의 짬짜미
이 사건들은 투자은행 및 증권사의 고유 업무와 깊숙이 연관돼 있다는 특징이 있다. 불법을 저지른 수법도 상당히 전문적이었다.
금융감독원 등에 따르면 최근 감독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는 A사는 국내 기업들에 컨설팅을 하면서 ‘코스닥 기업 등 국내 기업 10여 곳이 해외 전환사채(CB) 발행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A사는 해외 CB를 책임지고 소화해주는 조건으로 기업들에 △시가보다 낮은 전환가격의 CB를 발행할 것 △법적으로 CB의 주식 전환이 불가능한 ‘CB 발행 후 1개월 기간’에 주식을 팔 수 있도록 보유 지분(자사주 등)을 빌려줄 것 등을 제의했다.
결국 A사는 ‘해외 CB 발행 성공’이라는 호재로 주가가 오르는 틈을 타 미리 확보했던 지분을 팔고, 나중에 CB를 시가보다 낮은 가격에 주식으로 바꿔 B사에 도로 갚았다. 채권 발행의 수수료 수익은 물론 해당 기업이 제공한 각종 안전장치로 위험 없이 투자수익을 올린 것.
해당 기업은 자체 능력으로는 어려운 자금 조달에 성공했고, ‘외국인 투자자금 유치’라는 호재도 얻었다. 일반 투자자들만 해외에서 투자자금을 유치한 우수 기업인 줄 알고 투자했다가 낭패를 본 것이다.
이 과정에서 A사와 기업들은 몇 가지 불법을 저질렀다. 현행 규정상 해외에서 채권을 발행하는 기업이 이 같은 대주(貸株) 거래를 하려면 그 내용을 공시해야 하지만 이들은 그러지 않았다. 또 A사와 몇몇 곳이 CB를 인수하기로 각본이 짜여 있었지만 공모(公募) 발행으로 포장했다. 공모 방식일 때만 CB를 현 주가보다 싼 값에 발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부자 거래를 통한 주가조작 혐의에 대해서도 조사가 진행 중이다. 그러나 A사 측은 관련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 실추되는 글로벌 IB 명성
국내 증권가에서는 명성이 생명인 글로벌 IB가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는 데에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특히 IB업계에서는 컨설팅 부문에서 얻은 정보를 투자에 활용할 수 없도록 하는 등 업무 간 방화벽이 무너졌다는 점을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외국계 증권사의 한 관계자는 “위험관리가 생명인 IB 내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 의아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국내에서 불공정 행위가 반복되는 이유로 사법부의 느슨한 징계도 어김없이 꼽는다.
증권거래법에 따르면 시세조종이나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얻은 부당 이익이 50억 원을 넘으면 최대 무기징역까지 받을 수 있다. 법규정만 보면 ‘솜방망이’로 볼 수 없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지난해 서울중앙지검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시세조종 등의 혐의로 기소돼 법원 확정 판결을 받은 31명이 낸 벌금은 총부당이득금 71억4400만 원의 57%(41억3000억 원)에 불과했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는 “미국 등은 내부정보를 이용한 시세조종자가 다시는 금융시장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만큼 강한 제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이나연 기자 larosa@donga.com
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