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겼으면 철저히 믿어라” 기업문화… 삼성 출신 인재들 유통명가 견인
“서류에 사인하려고 하지 마라. 믿지 못하면 아예 쓰지를 말고 일단 사람을 쓰면 의심하지 마라.”
1979년 신세계백화점 영업사업본부 이사로 처음 회사 경영에 참여한 이명희 현 신세계 회장은 출근 전날 부친인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로부터 ‘경영 지침’을 받았다. “누군가에게 맡겼으면 전적으로 신뢰하라”는 것이다. 이명희 회장은 그 지침을 충실히 따랐다. 신세계그룹에는 지금도 이런 ‘이병철식 경영문화’가 그대로 남아 있다.
신세계는 1930년 문을 연 일본 미쓰코시(三越)백화점 경성지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을 모태로 한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백화점인 이곳은 광복 후 동화백화점으로 이름을 바꿨고 1963년 삼성그룹에 인수되면서 다시 신세계로 이름을 바꿨다. 신세계는 1991년 삼성그룹에서 계열 분리해 독립했다.
이후 대형마트로 사업부문을 넓히고 유통, 건설, 식품 등으로 외연을 확장해 지금은 15개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뿌리가 삼성인 만큼 신세계그룹의 각 계열사를 이끄는 주요 최고경영자(CEO)들은 대부분 삼성그룹 공채 출신이다. 그래서 신세계의 기업문화, 경영문화는 예전의 삼성과 비슷하다는 말도 있다.
신세계의 ‘오너 경영인’인 이명희 회장은 부친이 그랬던 것처럼 전문 경영인에게 힘을 실어주는 방식으로 신세계를 키웠다. 전문경영인인 구학서 부회장에게 거의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했고, 또 그의 판단을 지지했다.
○ ‘오너 경영인’과 ‘전문경영인’의 호흡
실제로 신세계그룹 결재 서류에는 회장 서명란이 없다. 신세계 관계자는 “구 부회장은 오너에게 정례보고를 하는 일이 없다”며 “구 부회장의 경영 판단을 전적으로 집행하는 빠른 의사결정 시스템이 현재의 신세계를 있게 한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이 서류에 서명하는 것은 1년 중 임원인사 때 단 한 차례다.
이 회장 아들인 정용진 부회장도 비슷하다. 1995년부터 신세계 경영에 참여했지만 여전히 ‘수업 중’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것도 전문경영인의 판단을 존중하는 스타일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경영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주로 현장을 챙기는 편이다. 신설 점포 개장식 행사에는 한 번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현장을 중요시한다. 정 부회장은 1994년 미국 브라운대를 졸업한 뒤 이듬해 12월 신세계 전략기획실 이사로 업무를 시작했다. 2006년 12월 구 부회장과 함께 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구 부회장은 오너의 전폭적 신임 아래 현재 신세계그룹을 실질적으로 이끈다. 1972년 삼성그룹 공채로 입사한 구 부회장은 삼성전자와 제일모직, 삼성물산 등을 거쳐 1996년 신세계 전무로 영입됐다. 1999년 대표이사 부사장에 오른 이후 9년째 ㈜신세계와 신세계그룹 경영을 총괄하고 있다. 삼성그룹 시절부터 주로 재무 업무를 담당해 온 ‘관리형’ CEO다. 의사결정은 신중하지만 일단 결정을 내리면 과감한 추진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8년 외환위기 시절 전국 땅값이 폭락할 때 이마트 용지를 대량 매입한 것도 기회를 놓치지 않는 그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마트는 이후 신세계의 핵심 성장 동력이 됐다.
○ ‘투 톱’과 전문성 갖춘 계열사 대표들
구 부회장 바로 아래에는 이경상 이마트부문 대표이사와 석강 백화점부문 대표이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이마트 경영을 총괄하는 이경상 대표이사는 이마트 지원본부장, 경영지원실장 등을 거쳤다. 2004년 12월부터 이마트 부문 수장(首長)을 맡고 있다. 중국 사업과 자체 브랜드 사업을 강화해 이마트의 경쟁력을 키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경상 대표이사가 ‘재무통’으로 분류되는 데 비해 백화점 부문을 이끄는 석강 대표이사는 ‘영업통’으로 불린다. 신세계백화점 마케팅실장과 인천점장, 강남점장, 영업본부장을 거쳤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의 개설 과정을 진두지휘해 이 지점의 매출을 롯데백화점 본점에 이어 전국 2위로 끌어올린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지난해 신세계 강남점 매출은 8042억 원이다.
허인철 ㈜신세계 경영지원실장(부사장)은 삼성물산 출신으로 1996년 신세계에 합류했다. 경영지원실 경리팀장과 관리 담당을 거쳐 2006년 경영지원실장으로 승진했다. 2006년 월마트코리아 인수 당시 실무를 맡아 깔끔하게 업무를 처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리틀 구학서’로 불리기도 한다.
이재호 신세계건설 사장은 삼성물산 건설부문에서 잔뼈가 굵은 건설 전문가다. 2005년 신세계건설 영업담당 부사장으로 영입됐고 이듬해 사장으로 승진했다. 이전에 주로 유통시설 건축에 치중하던 사업영역을 레저, 주거 및 사회간접자본(SOC) 시설 민자사업 등으로 넓혔다.
김해성 신세계인터내셔날(SI) 사장은 신세계백화점 패션사업부 해외상품팀장, SI 마케팅 팀장, SI 해외사업부장 등을 거쳐 2005년 SI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국제 감각이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다.
최병렬 신세계푸드 사장은 신세계백화점 고졸 사원으로 입사해 계열사 대표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신세계푸드 사장에 오른 뒤 만화 ‘미스터 초밥왕’을 모든 사원에게 읽도록 권유하며 장인(匠人) 정신을 주문해 화제가 됐다.
인터넷쇼핑몰(신세계몰)과 정보기술(IT) 시스템 개발을 하는 신세계I&C는 이상현 사장이 이끌고 있다. 이 사장은 삼성그룹 비서실 감사팀장, 삼성카드 경영지원실장 등을 거쳐 2004년 신세계I&C 사장으로 영입됐다.
최홍성 조선호텔 사장과 이석구 스타벅스커피코리아 사장도 삼성 출신이다. 최 사장은 지난해 조선호텔 사장으로 영입됐고 이 사장은 1999년부터 신세계에서 일하고 있다. 이 사장은 조선호텔 사장에서 지난해 스타벅스커피코리아로 자리를 옮겼다.
김용주 신세계첼시 사장은 삼성물산 의류기획팀장, 제일모직 여성복사업부 팀장, SI 대표 등을 거친 패션 전문가다.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유통은 타이밍”부사장급 임원 현장 진두지휘▼
지난해 말 신세계 임원 인사에서 가장 관심을 모은 보직은 이마트 자체브랜드(PL) 사업을 이끌 상품개발본부장 자리였다.
당시 신세계마트 대표를 맡고 있던 정오묵 부사장이 상품개발본부장에 낙점됐을 때 그룹 내부에서는 정 부사장만큼 대형마트 사업을 잘 아는 인물이 없다는 평가가 많았다. 정 부사장은 1993년 이마트 1호점 창동점 오픈을 주도했다.
하광옥 이마트부문 상품본부장은 유통회사와 협력회사가 함께 차별화된 상품을 만드는 조인트 비즈니스플랜을 이끌었다.
정일채 백화점부문 상품본부장은 1979년 입사 후 줄곧 백화점 한 길만 걸어왔다. 전국 백화점 점포 가운데 롯데백화점 본점에 이어 매출 2위인 신세계 강남점 출점을 추진했다.
박주형 백화점부문 지원본부장은 재무와 기획 분야에서 잔뼈가 굵었다. 유통사업의 맥인 터의 선정과 신규개발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심화섭 이마트부문 중국총괄 부사장은 부사장급 임원 가운데 유일한 외부 영입 인사다. 그룹 내 중국사업 비중이 커지면서 상무보로 영입된 지 1년 만에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심재일 이마트부문 지원본부장은 25년간 인사업무만 맡아온 인사통이다. 6만 명에 이르는 이마트 인사 업무를 총괄한다. 박건현 백화점부문 본점장은 유통업계가 인정하는 마케팅 전문가다.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 ‘2008 재계 파워엘리트’ 시리즈는 매주 화 목요일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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