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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8년 5월 29일 03시 00분


매출 매년 10% 가깝게 쑥쑥… 제일모직 제진훈 사장 ‘바둑 경영’ 화제

23일 경기 의왕시 제일모직 사옥.

이날 오전 11시 제1회 사내 바둑왕 선발대회 결승전을 알리는 사내(社內)방송이 흘러나오자 분주히 일하던 직원들이 하나 둘 일손을 놓고 3층 대강당에 모여들었다. 직원들은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들고 대형 스크린으로 생중계되는 바둑 경기를 관람했다.

최근 국내 기업들 사이에 ‘스피드경영’이 화제가 되고 있지만 제일모직은 겉으로는 예외인 것처럼 보인다. 이 회사 제진훈(61·사진) 사장의 색다른 경영 스타일 때문이다.

지난달 16일 제일모직 직원들은 ‘바둑이야기’라는 제목의 최고경영자(CEO) 칼럼이 담긴 e메일 한 통을 받았다.

제 사장은 ‘바둑이야기’ 칼럼에서 “요즘같이 빨리 돌아가는 세상에 진득하게 앉아 내면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도 큰 기쁨”이라며 ‘바둑 예찬론’을 폈다. 최근 시류(時流)에는 맞지 않는 듯한 제 사장의 칼럼에 일부 직원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칼럼을 꼼꼼히 읽은 직원들은 곧바로 바둑 동호회를 만들고, 바둑대회까지 열기로 했다. 제 사장이 바둑을 통해 강조한 것이 결코 ‘스피드경영’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제 사장이 ‘바둑이야기’를 통해 직원들에게 강조한 것은 ‘빠르고 창의적인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는 “바둑은 정답이 없고 의외의 변수가 많다는 점에서 불확실한 경영환경에 직면한 기업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며 “치열한 글로벌 경쟁과 시장 상황에서 창의적인 판단을 하는 데 더 없이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바둑 격언에 ‘정석을 알고 나면 바로 정석을 잊어라’라는 말이 있다”며 “고정관념에 얽매여 다른 시도를 못하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라고 덧붙였다.

제일모직은 시장 여건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제 사장이 취임한 2004년 이후 매년 10% 가까운 매출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이 회사는 최근 몇 년 동안 사업구조도 ‘조용히’ 바꿨다. 섬유가 모태이지만 패션부문 비중은 전체 매출에서 35.9% 수준으로 떨어졌다. 나머지는 케미컬과 첨단 전자소재부문이 차지하고 있다.

제일모직의 한 임원은 “한 수를 놓기 위해 짧은 시간에 수많은 생각을 빠르게 해야 한다는 것은 오히려 다른 어느 것보다 스피드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제 사장은 제1회 바둑대회 우승자인 케미컬부문 경영지원팀 박태균 부장에게 직접 시상한 뒤 “바둑은 시끄럽고 정신없는 세상 속에서 조용하지만 생각하는 힘을 길러 주는 좋은 운동”이라고 말했다.

조용우 기자 woogija@donga.com

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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