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협상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 입력 2008년 6월 2일 22시 46분


2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에 대한 농림수산식품부장관 고시의 관보 게재가 유보됨에 따라 한미 쇠고기 재협상이 가능한지에 대해 촉각이 쏠리고 있다.

최근 미국산 쇠고기 반대 시위가 '쇠고기 안전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넘어 반정부 성격으로 치닫고 있어 정부와 여당의 정치적 부담이 눈덩이처럼 커져가고 있다. 미국 입장에서도 한국 내의 여론 악화가 쇠고기 판매는 물론 한미 관계에까지 악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재협상 카드'가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국제기준에 따라 양국이 합의한 쇠고기 협상을 뒤집을 과학적 근거를 확보하기는 쉽지 않아 재협상을 위해서는 한미 양국간의 정치적 해법 이외는 뾰족한 대안이 없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재협상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정부와 미국 측은 국제수역사무국(OIE) 기준을 들어 쇠고기는 월령에 관계없이 광우병특정위험물질(SRM)을 제외하면 안전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야당과 시민단체는 30개월 이상 쇠고기의 전면 수입 금지를 요구하며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다.

정부는 "국가간 신뢰를 깨는 일이기 때문에 재협상은 없다"는 방침을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재협상 가능성 자체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달 한미 쇠고기협상 추가협의 결과에 대한 브리핑에서 "새로운 과학적인 발견이 있거나 OIE에서 특별한 다른 결정이 있는 경우 등의 사정 변경이 생기면 재협상의 계기가 된다"고 밝혔다.

특히 장관 고시를 유보하면서 "재협상은 없다"고 확언해온 정부 당국의 기류에 뚜렷한 변화가 엿보이고 있다. 그간의 해법이 먹히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는 가능한 모든 수를 써야 한다는 쪽으로 돌아선 것이다.

하지만 자칫 '재협상 카드'가 외교 문제로 비화할 수 있기 때문에 숙고를 거듭하고 있다. 당장 국제기준을 뒤엎을 만한 과학적 근거를 확보하기도 쉽지 않고 재협상의 가능성을 열어줄 미국과 대만, 일본의 쇠고기 위생검역 협상 결과도 예단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정치적 타협이 재협상 변수

정부 일각에서는 "재협상이 무리라면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를 검역해 30개월 이상을 가려내 고시하는 방법으로 30개월 이상 쇠고기에 대한 불안감을 덜어주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검역을 통해 30개월 이상 쇠고기를 가려내기 어려운 데다 미국과의 통상 마찰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미국 측의 합의도 필수적이다.

결국 현 상황에서 재협상을 하거나 국내 검역을 강화하더라도 양국간의 정치적 타협이 필수적일 것으로 보인다. 한 정부 당국자는 "법리적 해석보다 한미 양국의 대승적 관계에서 정치적 타협을 할 경우 재협상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야권도 국가 간 협상 결과를 무조건 뒤집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재협상을 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상황'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통합민주당 자유선진당 민주노동당 등 야 3당이 발의한 30개월령 이상 쇠고기의 수입을 금지하는 '가축전염병예방법' 개정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한나라당이 협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 같은 전략 때문으로 풀이된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장관고시와 충돌할 수밖에 없어 필연적으로 재협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개정안을 입법부가 발의해 통과시킨다는 점에서 협상 파기에 따른 정부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는 계산도 깔고 있다.

미국입장에서 '실리'로만 보면 30개월 이상 쇠고기의 비중이 큰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쇠고기의 85%가 30개월 미만 소에서 나온다. 또 이번 협상에 따라 30개월 이상 쇠고기가 수입되더라도 전체의 5%가 넘지 않을 전망이다. 2003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액 8400억원을 기준으로 따지면 420억 원밖에 되지 않는 시장이다. 금액으로 보자면 반대급부 제공을 통해 설득할 수 있는 금액으로 볼 수도 있다.

●미국 측의 반발과 반대급부도 걸림돌

하지만 미국 측이 '자국 국민이 먹는 것과 똑같은' 쇠고기의 수출 금지 조항을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입 금지를 받아들일 경우 대만 일본과 쇠고기 협상에서 선례가 된다는 점도 미국에게는 부담이다.

국제 협상 무대에서 한국 측의 위상추락도 피할 수 없다. 한 정부 당국자는 "잉크도 마르지 않았는데 재협상을 요구한다면 어느 나라가 한국과 협상하려고 하겠느냐"고 말했다. 최악의 경우 한미 FTA 비준동의안의 미국 의회 통과에 불똥이 튈 수도 있다.

설혹 미국이 한국 정부의 재협상 요구를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미국 측이 이에 상응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자동차 분야 재협상 등의 반대 급부를 요구할 가능성도 높다.

미국 민주당의 유력 대선후보인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은 "한·미 자동차 교역은 불공정하다"며 한미 FTA 반대 공세를 펼치고 있다.

현재 미국은 "한국의 재협상 요구를 받은 적도 없고, 국제기준에 따라 이뤄진 협상으로서 아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재협상을 공식 요구해오면 검토는 하겠지만 국제 기준에 따른 것이므로 현행법 상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한 정부 당국자는 "미국 행정부와 정치권이 축산농가의 이해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급박한 상황의 변화 없이 쇠고기 재협상을 받아들이고 자동차 등 다른 이슈를 반대급부를 요구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크지 않다"고 말했다.

박용기자 parky@donga.com

주성원기자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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