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증시-부동산시장 침체로 ‘길 잃은 돈’ 몰려
에너지 투자 헤지펀드 4년새 180개서 630개로
“현재 석유 수급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최근의 유가 급등은 투기와 더 밀접하게 연결돼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증산에 나선다고 해도 유가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알제리 석유장관이기도 한 차키브 켈릴 OPEC 의장은 지난달 31일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밝혔다.
최근 국제 유가가 급등한 데에는 헤지펀드 등 글로벌 투기세력의 자금이 석유시장에 대거 몰렸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달러화 약세와 중국 등 신흥시장의 수요 급증도 부분적인 이유이지만, 유가가 상승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투기를 부추기고 투기가 다시 국제유가를 끌어올리는 악순환이 거듭되는 것이 유가 급등의 더 큰 원인이라는 주장이다.
○ ‘숨은 손’으로 지목받는 투기자본
석유 등 에너지시장에 투자하는 헤지펀드는 2004년 180개에서 2008년에는 630개로 늘어났다. 헤지펀드들이 석유선물시장에 뛰어들면서 석유 선물거래 규모도 2005년 1조7000억 달러에서 지난해에는 7조 달러로 급증했다. 신화통신은 현재 석유시장에서 공격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투기 자본의 규모가 1000억 달러에 이른다고 전했다.
이러다 보니 투기성 자금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도 커지고 있다. 한 예로 6일 뉴욕상업거래소에서 서부 텍사스산 중질유(WTI) 가격이 하루에 사상 최고가인 배럴당 10.75달러(8.41%) 급등하자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가능성 언급에 따른 원유수급 불안 외에도 투기성자금이 석유시장에 몰린 것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이날 석유선물거래 건수는 평상시의 두 배인 4700만 주에 달했다.
○ 석유시장에 투기자본이 몰리는 이유
막대한 자금 동원력을 가진 헤지펀드 등이 석유시장에 눈을 돌린 것은 세계적으로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이 침체하면서 마땅한 투자처가 없기 때문. 최근 폭등세를 보이고 있는 곡물시장에 돈이 몰리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그동안 높은 수익률을 안겨줬던 서브 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시장이 지난해 이후 최악의 투자처로 전락하면서 갈 곳을 잃은 투기자금이 대거 석유시장에 몰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게다가 달러화 가치도 계속 하락하면서 석유는 금과 함께 리스크를 피하기 위한 안전한 투자처로 각광받고 있다.
세계적인 에너지컨설팅회사인 파이라 에너지그룹의 마크 슈워츠 회장은 “헤지펀드뿐만 아니라 모든 투자자가 투자 다양화(포트폴리오) 차원에서 석유시장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돈이 몰려들면 가격이 오르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나아가 월가가 최근 석유선물시장과 연동된 다양한 인덱스(지수) 상품을 개발한 것도 석유선물시장에 더욱 돈이 몰려들게 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 “유가급등으로 투기자본 몰린 것” 반론도
유가급등에 투기자본이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미국은 석유선물시장에 대한 규제강화를 본격화하고 있다. 그동안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던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는 지난해 말부터 석유선물시장에서 투기자본과 헤지펀드 등의 시장교란 행위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이와 함께 엔론 등의 로비로 사실상 무력화됐던 에너지 선물 거래에 대한 규제 방안을 다시 도입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정치권도 한층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 상원위원은 민주당 경선과정에서 “석유시장에서 에너지 거래자들의 투기행위에 대해 대대적인 단속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투기 수요가 유가 급등을 가져왔다는 주장에 대해선 반론도 나온다. 월터 루켄 CFTC 위원장은 “최근 고유가의 원인은 투기세력보다는 수요 증가에 인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당수 전문가들도 “유가 급등 때문에 투기세력이 석유시장에 몰려들고 있는 것이지, 투기세력 때문에 유가 급등이 발생한 것은 아니다”라고 해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