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여 타이밍 운 좋았을뿐… 사전 지시 안해
재용이 후계능력 없으면 이어받지 못할것”
■ 삼성 父子 함께 출두
배임 및 조세포탈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삼성전자를 성장시킨 과정을 설명하며 법정에서 눈물을 보였다.
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 민병훈 부장판사는 이 전 회장에게 “가장 중요한 계열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아들 재용 씨가 삼성에버랜드를 통해 삼성생명 등 그룹 전반의 지배구조를 확립한 것을 겨냥한 질문이었다.
이 전 회장은 머뭇거림 없이 “삼성전자, 삼성생명이 제일 중요하고 삼성증권은 미래를 위해 중요하다”고 답했다.
이어 “삼성전자 제품 11개가 세계 1위에 올랐습니다. 1위는 정말 어려워요”라며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전 회장이 공개석상에서 눈물을 보인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민 부장판사는 “잠시 감정을 추스르고 답하라”고 했고 변호인은 휴지를 건넸다.
이 전 회장은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런 회사를 또 만들려면 10∼20년 갖고는 안 될 것”이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본인은 지배주주인가 경영자인가”라는 질문에는 “회사 주인은 주주고 나는 완전히 경영자다. 늘 기술개발과 디자인경영, 10년 뒤엔 무엇을 먹고 살지만 고민해 왔다”고 답했다.
“평생 인감도장을 만져보지도 못했다”고 말할 정도로 이 전 회장은 자신은 경영에만 매진했고 재산 관리는 관리인이 따로 했다고 주장했다.
경영권 유지에 대해서는 “연구개발을 잘해서 세계 1등을 더 내고 열심히 하는 것이 제일 강한 수비”라고 말했다.
아들 재용 씨의 편법 증여 혐의에 대해서는 사전에 지시한 적이 없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증여할 때 타이밍이 좋아서 조금 투자해도 많이 올라간 것으로 완전히 운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재용 씨가 에버랜드 전환사채(CB) 및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인수한 과정도 “모두 실무자들이 한 일이라 당시엔 몰랐지만 법적 도의적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말했다.
차명 재산은 “빨리 실명화해 좋은 일에 많이 쓰겠다”고 밝혔다.
그룹 승계에 대해선 “재용이의 능력이 후계자로 적당하지 않으면 (그룹을) 이어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못 박았다.
이날 재용 씨는 증인으로 출석해 아버지와 나란히 법정에 섰다.
변호인은 재용 씨의 증인 신문에 앞서 “아버지가 아들의 증언을 보는 것이 참담할 것”이라며 재판부에 이 전 회장의 퇴정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 전 회장은 변호인을 끌어 앉히며 “그냥 듣겠다”고 거부했다.
재용 씨는 CB 및 BW 등의 인수 과정에 대해 “당시엔 유학 중이라 잘 몰랐다”며 “회장의 포괄적 지시하에 자산관리인이 취득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재판 말미에는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이 양형 관련 증인으로 나와 “이 전 회장의 차명 재산 명의자 중에는 전직 장관과 현직 경제단체장 등 사회 고위층도 있다”며 지배구조 투명화를 위해 엄중한 판결을 요구했다.
반면 최학래 전 한겨레신문 사장은 “이 전 회장이 2조 원대의 차명 재산 대부분을 인재 개발 등 사회 환원에 쓸 것”이라며 국가 경제에 기여한 점 등을 감안해 선처를 호소했다.
이종식 기자 bel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