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월 인도네시아 발리 덴파사르 공항. 열대지방의 겨울바람은 포근했지만 한국인 사업가 한정국(53) 회장에게는 서울의 겨울만큼이나 차가웠다. 잇단 사업 실패에 이어 마지막으로 기대했던 가구공장마저 문을 닫은 터였다. 갈 곳 없던 그는 3년 전 우연히 갔던 발리를 다시 찾았다. 그에게 발리는 도피처였다. 》
17년이 지난 2008년 6월 한 회장은 발리 리조트 업계의 대부가 됐다. 발리 3대 지주로 꼽히는 그는 여의도 면적의 4배에 육박하는 3306만 m²의 땅을 갖고 있다. 대형 리조트 3곳을 포함해 한 회장의 자산은 수천 억 원에 이른다.
한국에서 2번, 인도네시아에서 7번. 그가 부도를 낸 횟수다.
발리 현지에서 만난 한 회장은 “위기 뒤에 기회가 온다는 믿음과 뚝심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7번의 부도를 견딘 건 뚝심
한 회장의 첫인상은 동네 아저씨였다. 살짝 처진 눈매에 웃는 얼굴, 그러나 눈빛은 날카로웠다. 그는 현지 사람들에게 ‘하리마우’(인도네시아에서 쓰는 말레이어로 호랑이란 뜻)로 불린다.
발리에서도 10년 새 7번의 부도를 겪었으니 눈빛이 날카로울 만도 하다.
“사업 실패 후 도망치다시피 왔으니 심정이 오죽했겠습니까. 한국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 생각에 잠 못 이룬 적도 많았습니다.”
그는 발리의 풍부한 자연 자원에 주목했다. 처음 시작한 사업은 현지에서 잡은 바닷가재를 한국에 수출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보기 좋게 실패였다. 한국으로 실어오고 세관을 거치는 동안 신선도가 떨어져 헐값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한 회장은 가구, 위패(位牌) 등에 잇달아 손댔지만 역시 부도로 이어졌다. 저임금을 이용하려 했지만 현지인의 기술이 떨어져 반품 요구가 잇달았다.
그는 2001년 7번째 위패 공장의 부도 앞에서 자살을 생각했다. 남은 게 없었다. 몇 차례 부도 과정에서 이미 한국의 부인과도 헤어졌다. 우울증이 찾아왔다. 그는 “기회가 반드시 올 것이란 믿음이 없었다면 그때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고 했다.
○‘현지인이 보지 못한 가치를 보다’
한 회장은 우울증 탓에 6개월 동안 집에만 있었다. 2001년 말 반년 만에 거리로 나선 그는 우연히 친분이 있던 현지인을 만났다.
그 현지인은 “농사도 짓지 못하는 쓸모없는 땅이 있는데 좋은 조건으로 줄 테니 사 달라”고 한 회장에게 요청했다.
발리 남부 ‘쿠타웅아산’ 지역 5만 m²의 땅값은 800만 원. 한 회장은 잔금을 2년 후 갚기로 하고 단돈 몇십만 원에 이 땅을 샀다.
“현지인은 땅의 가치를 농사 여부로만 판단했지만, 저는 빼어난 경치의 잠재력을 봤죠.”
그는 5만 m²에 ‘풀 빌라’(Pool Villa·수영장 등이 딸린 독립된 빌라) 9채를 지었다. 발리에 특급 호텔이 즐비하지만 독립 공간이 보장되는 풀 빌라가 전무했기 때문. 그의 계산은 적중해 풀 빌라에 예약이 폭주했다. 그는 풀 빌라 42채를 추가로 지어 ‘드림랜드 리조트’로 이름을 붙였다. 7번의 실패 끝에 얻은 첫 성공이었다.
○위기가 진정한 기회
2005년 ‘발리 폭탄 테러’가 발생하자 부동산 값은 폭락했다. 그에게 두 번째 기회가 온 셈이다.
그는 현재 ‘샤토 드 발리’ 리조트 터 15만2000m², ‘파당바이’ 리조트 터 9만9000m² 등을 헐값에 사들였다. 매입가는 현 시세의 10%인 3.3m²당 3만∼4만 원.
현지인들이 추가 테러 공포에 떨 때 그는 새로 사들인 땅의 경치에 가슴이 벅찼다.
그는 “한국의 외환위기처럼 인도네시아의 테러 공포도 일시적일 것으로 믿었다”고 말했다. 천혜의 절경이 일시적 공포를 극복시킬 것이란 믿음이었다.
당시 사들인 ‘샤토 드 발리’ 리조트 터 등은 인근에 세계적 리조트가 잇달아 들어설 정도로 사업성이 뛰어난 곳이었다.
이 땅들은 현재 리조트로 개발 중이거나 완공돼 한 회장을 ‘발리 드림’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난 실패와 친한 사업가”
6월 23일 한 회장은 샤토 드 발리 리조트 공사 현장에서 인부들과 섞여 있었다. 하루 종일 현장을 챙기는 게 습관이 됐다. 그는 “나는 성공보다 실패와 친한 사업가”라며 “그 덕분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한 회장은 해외 투자에 나섰다가 자금만 묶인 한국인들에게도 한마디 했다. 그는 “실패할 때마다 현지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며 “적어도 10년 정도는 몸부림하며 현지를 파악해야 기회가 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 회장은 발리에 진 빚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보육원을 지을 계획이다.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들을 자신의 리조트에 취업시키려는 것. 한국인보다 한국음식을 더 잘하는 29세 현지인 아내도 한 회장의 계획에 적극 찬성이다.
한 회장의 사무실에는 드림랜드 그룹의 사훈이 붙어 있었다. ‘머리를 써라, 안 되면 땀을 흘려라.’
발리=정혜진 기자 hye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