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층 - 주거용 할 것 없이 설계 참여 급증
분양가 인상 - 국내건축 경쟁력 저하 우려도
2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는 용산 역세권 개발의 초고층 설계 공모전에 참여할 건축가들의 명단이 발표됐다.
서울시와 용산역세권개발㈜이 이날 선정한 5명은 모두 외국의 이름난 건축가였다. 9·11테러로 무너진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의 재건축 설계를 맡은 다니엘 리베스킨트(미국), 아랍에미리트 ‘버즈 두바이’를 설계한 무스타파 케말 아바단(미국) 등이 눈길을 끌었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국내 건축설계사무소의 한 관계자는 “한국의 랜드마크 건물은 모두 외국인이 설계한다는 게 실감난다”고 말했다.
초고층 건립이 활기를 띠면서 외국의 세계적 건축가들이 한국으로 몰려들고 있다. 한국 건축계의 초고층 설계 경험이 부족한 데다 해외 유명 건축가를 참여시키면 사업 추진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사업주는 세계적 건축가의 작품을 환영하고 있지만 국내 건축계의 설 자리가 좁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외국 건축가의 국내 진출은 1995년 우루과이라운드(자유무역을 규정한 다자간 국제협정) 가 발효되면서 시작됐지만 2, 3년 전까지는 뜸했다. 하지만 최근 초고층 빌딩 건립이 잇달아 추진되면서 외국 건축가의 한국 진출이 급증하고 있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센터(DMC) 타워는 640m, 133층 규모다. 이 사업을 맡은 서울랜드마크컨소시엄은 세계적 초고층 설계업체인 미국의 ‘솜’과 손을 잡았다.
6월 20일 인천경제자유구역 송도국제도시에서 기공식을 가진 인천타워(610m)의 설계도 미국계 건축설계업체인 ‘포트먼 홀딩스’가 맡았다.
초고층 외에 주거용 건물에서도 외국 업체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현대산업개발은 부산 해운대에 지을 고층 주상복합 ‘아이파크 마리나’의 설계를 다니엘 리베스킨트에게 맡겼다. 같은 곳에 들어설 고층 주상복합 ‘해운대 두산 위브 더 제니스’의 설계는 중국 상하이 엑스포 복합단지 등에 참여한 ‘디 스테파노 앤드 파트너스’가 맡았다.
GS건설도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짓는 ‘서교 자이밸리’의 상업시설 설계를 일본 ‘저디 파트너십’에 맡겼다. 이 회사는 일본 도쿄의 ‘롯폰기 힐스’를 맡아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해외 건축가의 국내 진출이 늘어난 것은 한국에 초고층 설계 경험이 풍부한 업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한국 업체들이 시공은 잘하지만 초고층 기본설계나 디자인 등에서는 여전히 외국 업체에 실력이 달린다는 지적이 많다.
외국의 세계적 건축가들이 설계를 맡으면 해당 사업 추진이 쉽다는 분석도 나온다. 국내 대형 건축설계업체인 희림의 고위 관계자는 “사업 컨소시엄을 구성할 때 세계 유명 건축가가 참여하면 발주처가 높은 점수를 주므로 수주할 확률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자금 조달이 쉽다는 것도 외국 건축가를 선호하는 이유로 꼽힌다.
서울시가 추진 중인 ‘플로팅 아일랜드(인공섬)’의 설계에 외국 업체가 참여한 것이 알려지자 사업에 참여하려는 투자자들의 문의가 늘어나기도 했다. 국내 건축업계에서는 “외국의 유명 건축가가 참여한 사업은 인·허가를 받기도 쉽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해외 유명 건축가들의 국내 건축물 설계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세계적 건축가의 작품이 들어서면 해당 건물도 경쟁력을 가질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부작용 우려도 나온다. 국내 건축가도 충분히 설계할 수 있는 주거용 건물까지 외국인에게 맡기면 분양가만 올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S건설 관계자는 “외국 건축회사에 주거용 건물의 설계를 맡기면 국내 업체보다 3배 이상의 비용이 들기 때문에 분양가가 높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 건축업계의 경쟁력 저하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외국인들이 국내 초고층 설계를 도맡으면 한국 업체가 경험을 쌓을 수 없다는 얘기다.
건축업체인 이인에스엔지 고성호 사장은 “건축 선진국인 일본도 초기에는 외국 유명 건축가와 국내 건축가들이 함께 설계를 맡도록 유도해 일본 건축가들의 설계 수준을 끌어올렸다”며 “국내 초고층 건축 붐이 외국인만의 잔치로 끝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정혜진 기자 hye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