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메릴랜드 주 실버스프링에 사는 테닐 바라싱(28·여) 씨는 요즘 인근 구직지원센터를 거의 매일 들락거린다. 은행에 다니던 그는 올해 초 금융위기 속에 직장을 잃은 뒤 아직 새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지금까지 바라싱 씨가 구직신청서를 낸 곳은 무려 1000여 곳. 북적이는 구직자 속에서 구인정보를 확인하고 인터넷이나 팩스도 빠짐없이 확인하고 있지만 상황은 달라진 게 없다. 그는 최근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일단 어디든 취직하고 보라는 조언을 듣지만 그런 식으로도 취직할 곳조차 못 찾고 있다”고 말했다. 지구촌에 실업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기업들이 경비 절감을 위해 속속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고유가 속에 진행되는 현재의 실업은 과거와는 성격이 사뭇 다르다는 점에서 구직자들의 시름은 깊어가고 있다.》
6개월새 일자리 43만개 없어져… 장기실직자 160만명
유럽도 악화일로… 과거와 달리 고소득자 실업도 급증
○ 사라지는 일자리
대량 실업의 진원지는 경기 악화로 휘청거리는 미국이다.
지난주 미국 노동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6월 한 달 동안 미국에서는 6만2000개의 일자리(농업 부문 제외)가 사라졌다. 최근 6개월간을 합치면 모두 43만8000개의 일자리가 없어졌다. 건축과 제조업 분야의 일자리 감소세가 두드러진다.
이로써 올해 들어 6개월 넘게 실직 상태에 있는 장기 실직자도 160만 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7% 늘어났다. 이는 전체 실직자의 18%로 2001년 경기침체 때(11%)보다 훨씬 높다.
현재 실업률은 5.5%로 올해 5월에 전월 대비 0.5%포인트 뛰어오른 이후 일단 추가 상승세는 멈춘 상태다. 하지만 이는 1986년 이후 월간 기준으로 최악이라는 실업률 증가세 이후 잠시 주춤한 것일 뿐이라는 시각이 많다.
게다가 42만 명으로 늘어난 구직을 포기하는 사람들은 실업률 산정 수치에서 아예 빠졌다. 메릴랜드대 피터 모리치 박사는 “구직을 포기한 사람들까지 합치면 실업률은 7.2%로 늘어난다”고 지적했다.
유럽 국가들의 실업률 추이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지만 스페인의 실업률은 건설분야의 타격으로 9.9%까지 치솟았다. 아일랜드의 지난달 실업률(5.7%)도 1999년 이후 가장 높다.
독일은 지난주 이례적으로 실업률이 15년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언론들은 “고유가와 금융위기가 노동시장을 강타하면 이 상황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부정적인 예상을 함께 내놨다. 정부의 창업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한 100만 명의 독일인이 통계에서 빠졌다는 지적도 덧붙였다.
○ “앞으로 더 나빠진다”
미국에서 경제활동인구 증가세를 감안하면 최소한 매달 일자리 10만 개가 새로 창출돼야 한다. 하지만 올해는 반대로 매달 평균 7만3000명이 경제활동을 중단했다. 경제가 침체기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는 유력한 근거 중 하나다.
뉴욕타임스는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 이 같은 고실업 현상이 장기화할 가능성을 언급했다. 기업들이 점점 커지는 미래의 불확실성 앞에서 고용과 설비 투자에 소극적인 것이 주요 원인이다.
지난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내년 말까지 선진국의 평균실업률이 6%에 이를 것”이라는 추정치를 내놨다. 이 전망대로라면 3480만 명이 일손을 놓게 된다.
특화된 제조업 분야의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시장성 있는 기술이 부족한 고소득 연봉자의 실업이 대거 발생하는 것도 과거와는 다른 특징이다. 골드만삭스의 앤드루 틸턴 연구원은 “실업자를 채용할 수 있는 일자리의 성격이 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최근의 실업 문제는 예상보다 심각하다”며 “이는 앞으로 고유가와 함께 소비자물가지수도 악화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파이낸셜타임스도 “실업 가능성이 인플레이션과 소득 감소에 따른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기업들의 감원 소식도 이어지고 있다. GM과 포드, 크라이슬러 등 미국 3대 자동차업체들은 이미 공장 폐쇄와 대규모 구조조정 계획을 마련해 놓은 상태. 스타벅스가 600개의 점포 문을 닫고 1만2000명을 해고할 계획이고 아메리칸항공도 승무원 수를 줄이기로 했다.
미국 민주당의 싱크탱크인 경제정책연구센터의 딘 베이커 공동대표는 “경기침체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어 급격한 실업률 상승은 나타나지 않겠지만 그 여파는 점차적으로 더 많은 분야로 확산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