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에 하는 반찬 준비도 못했어요.”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서 10년 넘게 한식당을 운영해 온 이모(47) 씨. 18일 점심때가 다 됐지만 식당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고, 이 씨는 당일 장사를 위해 미리 준비하는 반찬 만드는 일도 포기한 채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손님이 없어 몇 차례 만들어 놓은 반찬을 그냥 버린 뒤 가게 문을 닫고 싶었지만 학교 다니는 아이들 생각에 “오늘은 좀 낫겠지” 기대하며 가게 문을 열었다고 했다. 우리 사회의 ‘허리’인 중산층이 흔들리고 있다. 물가와 금리, 주가 등 주요 경제지표는 어느 것 하나 긍정적인 것이 없어 중산층의 힘들고 고단한 삶을 버텨내줄 ‘희망의 끈’ 역할조차 못하고 있는 데다 촛불집회의 장기화,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등이 겹치면서 막연한 불안감마저 증폭되고 있기 때문이다. 》
○ 불안감에 휩싸인 직장인들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 회사의 마케팅팀 김모(34) 과장은 올해 들어 다시 가계부를 꼼꼼하게 쓰기 시작했다. 지출을 정확히 파악해 낭비 요소를 없애기 위해서다. 최근에는 ‘술자리가 있어도 밤 12시 전에 귀가한다’는 원칙도 세웠다. 술자리를 일찍 끝내면 술값을 줄이고 택시를 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아껴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한다.
강남에 있는 한 광고대행사 직원들은 최근 회사에 도시락을 싸올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건의했다.
이 회사 이모(35·여) 차장은 “주변에서 ‘한국이 필리핀이나 남미 국가처럼 되는 게 아니냐’며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다”고 전했다.
동아일보 산업부가 최근 채용정보업체 잡코리아와 함께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답한 직장인 45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이 같은 ‘불안감’이 어느 정도 확인됐다.
응답자 가운데 93.9%(421명)는 “유가, 물가, 경제성장률 등 각종 경제지표를 보면 막연한 불안감이 든다”고 답했다.
‘불안감’은 40대(100.0%)와 30대(93.6%)가 20대(88.9%)나 50대(84.8%)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불안감의 종류(복수응답)에 대해선 ‘한국 경제가 무너질 것 같다’(54.9%), ‘실업대란이 올 것 같다’(51.1%), ‘매우 심각한 사회혼란이 일어날 것 같다’(50.8%) 등 다양했다.
이 때문에 현 경제상황을 1997년 외환위기 때와 비교하는 직장인도 부쩍 늘었다.
대기업 임원인 임모 씨는 “외환위기 당시에는 경제만 나빴는데 요즘은 상습적인 불법시위와 독도 문제,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 등 대내외적인 골칫거리도 많다”며 “외환위기 때보다 사는 게 더 팍팍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직장인들에게 ‘현재 국내 상황이 1997년 외환위기 때와 비슷하다고 느끼는가’라고 묻자 10명 중 7명 가까이(67.0%)가 “그렇다”고 답했다.
○ 한숨 쉬는 자영업자 - 중소기업
경제적, 사회적인 불안은 ‘월급쟁이’인 직장인보다 자영업자나 중소기업인에게 더 크고 실질적인 타격을 가하고 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서 한우전문점을 운영하는 김모(39) 사장은 18일 “정말 너무 힘들다. 수익은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냥 가게를 유지할 수만 있어도 좋겠는데…”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 사장의 가게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월평균 5000만 원가량의 매출을 올릴 정도로 잘됐지만 올해 들어선 월 2000만 원의 매출도 올리지 못하고 있다. 김 사장은 “장사를 계속해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음식점과 함께 예비 창업자들이 손쉽게 뛰어드는 슈퍼마켓도 사정은 비슷하다. 전국의 슈퍼마켓 13만여 개 가운데 2만5000여 개가 속한 한국슈퍼마켓연합회에 따르면 올해 들어 매월 평균 400여 개의 슈퍼마켓이 문을 닫고 있다.
한국슈퍼마켓조합연합회 김경배 회장은 “외환위기 때도 폐업하는 곳이 월 200∼250개였는데 올해는 월 400개 정도가 문을 닫고 있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어렵더라도 국민들이 다같이 해보자는 분위기가 있으면 되는데 한쪽에서 계속 사회 불안을 야기하고 있으니 장사가 되겠느냐”며 “자영업자들 다 망하고, 나라도 망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창업경영연구소 이상헌(44) 소장은 “창업 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외환위기 이후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는 없었다”며 “경비를 최대한 줄이고 수익성을 극대화하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중소제조업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최근 중소기업인 16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10명 중 7명(69.3%)이 “올해 매출액이 줄었다”고 답했으며, 평균 매출액 감소율은 28.3%로 나타났다.
중소기업의 공장가동률은 급격히 떨어지고 대출 연체율은 급등하고 있다.
세계 콘돔 입찰 시장 점유율 1위인 중소기업 ‘유니더스’는 최근 인력을 줄이고, 직원들에게 특근을 못하게 했다. 공장 연료도 벙커C유에서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액화천연가스(LNG)로 교체하고 있으며,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생산설비를 자동화하는 작업을 가속화하고 있다.
유니더스 정도식 이사는 “원·부자재 가격이 올해만 50% 올랐지만 제품 가격은 10%밖에 올리지 못했다”며 “살아남기 위해선 비용을 최대한 줄이고 생산량을 늘리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조용우 기자 woogija@donga.com
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