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에도 부분파업을 이어간 현대자동차 노조와 달리 같은 현대·기아차그룹 계열사인 BNG스틸은 지난달 26일 올해 임금단체협상을 회사 측에 일괄 위임했다. 윤달수 BNG스틸 노조위원장은 18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유가와 원자재 값이 폭등한 가운데 회사 주력제품인 스테인리스스틸 시황도 악화된 점을 외면할 수 없었다”며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10여 년간 쌓아온 회사와의 신뢰를 다시 믿었다”고 말했다.》
경제위기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노동계가 임금 인상 요구를 자제하고 재계가 일자리 확대 약속으로 화답하는 등 위기 극복을 위한 고통분담에 나서는 사례가 늘고 있다. 전문가들은 스태그플레이션 상황에서 환율시장 개입 등 대증(對症)요법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장기적으로 경제체질이 개선될 때까지 각 경제주체가 고통을 각오하고 분담해야 이겨낼 수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반대로 기업은 제품 값을 올리고, 근로자는 임금 인상을 주장하면서 제 밥그릇만 챙기고 정부마저 경제안정화에 실패할 경우 임금이 물가를 견인하는 악순환이 이어지면서 1, 2차 오일쇼크 때처럼 위기가 확대 재생산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 노동계, 임금인상 요구 자제
LG전자는 올해 2년 연속 임금 동결, 19년 연속 무분규 임단협 타결을 이뤄냈다. 박준수 노조위원장은 “LG전자는 나 혼자만의 회사가 아니다. 현 노조원들만의 회사도 아니다. 임금 동결은 우리 자식, 우리 후손도 오래 다닐 수 있는 경쟁력 있는 LG전자를 만들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한항공 노조도 최근 고유가의 직격탄을 맞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임금 동결을 선언했다. 항공유 가격이 지난해 6월 배럴당 83달러에서 1년 만에 162달러로 2배로 뛴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동국제강, 유니온스틸, 유니온코팅, 국제종합기계, 동국통운 등 동국제강그룹 5개 계열사 노조는 올 3월 한꺼번에 임단협을 사측에 위임해 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노동부가 100인 이상 사업장 6745곳의 임금교섭 타결 현황을 분석한 결과 지난달 30일 기준으로 임금교섭 타결 비율은 26.7%(1804개 사업장)로, 지난해 같은 기간(22.5%)보다 4.2%포인트 높아졌다. 이들 사업장의 평균 협약임금인상률도 1월 7.0%에서 6월 5.1%로 낮아졌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조사에 따르면 임금 교섭권을 사측에 위임하거나 교섭 없이 임금 및 단체협약 협상을 마친 기업의 비율이 7일 현재 67.5%로 2007년(37.7%)보다 1.8배로 늘었다.
노조가 임금 인상 자제와 무파업을 선언하고 사용자는 고용 안정을 약속하는 노사협력선언도 올해 들어 15일 현재 1167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431건에 비해 170.8% 늘었다.
○ 기업들은 고통분담 기금 조성
근로자만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면 그것은 고통분담이 아니다. 정유업계는 18일 1000억 원의 특별기금을 조성해 에너지 소외계층 지원과 에너지 효율 제고, 에너지 절약 운동 등에 쓰겠다는 내용의 ‘고유가 고통분담을 위한 정유업계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업계는 선언문에서 “정부 기업 가계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한데 힘을 모은다면 지금의 이 위기도 반드시 극복해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식품업계도 고통분담에 나서 이날 동아제분은 21일부터 밀가루 제품 가격을 8∼10% 인하하겠다고 밝혔다. 노동환 동아제분 상무는 “국내 밀가루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밀 통관 가격은 계속 상승하고 있어 제분업계도 힘든 상황”이라며 “하지만 물가 안정을 위해 고통을 분담한다는 차원에서 가격을 인하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CJ제일제당과 대한제분도 다음 주 밀가루 가격을 10% 안팎으로 인하할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3일에는 재계가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5단체 명의의 발표문을 통해 당초 계획한 투자를 차질 없이 집행하고 중소기업은 ‘1사 1인 추가채용’을, 대기업은 10% 이상 신규채용을 늘리는 캠페인을 전개하기로 했다.
승용차 홀짝제 운행 등 고유가에 따른 위기관리 대책을 이미 시행하고 있는 공공부문도 예외는 아니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은 최근 고통분담 차원에서 올해 임금 인상 요구를 자제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상무는 “사회 전반에 허리띠 졸라매기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정부는 일관된 정책과 리더십으로 장기적으로 고통분담의 결실이 경제주체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간다는 신뢰를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유덕영 기자 fire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