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떠나는 증시에 ‘장기 투자자’ 버팀목 기대
기업 지배구조 영향력 행사 투명경영 강화 계기
‘고위험 투자’ 실패땐 고령화 사회 대란 부를수도
지난해 말 국민연금의 총자산은 220조 원으로 세계 연기금 중 5위였다. 2043년에는 자산 규모가 2600조 원으로 불어나 그 해 국내총생산(GDP)의 47%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렇게 막대한 규모의 국민연금이 주식투자 비중을 단계적으로 4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방침을 밝힘에 따라 한국 증시에는 큰 변화가 예상된다.
우선 최근 외국인들이 증시에서 계속 주식을 팔고 나가는 상황에서 국민연금은 증시를 떠받힐 '장기 투자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고령화 사회에서 국민들의 노후를 책임질 국민연금 기금을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주식 등에 투자했다가 연금의 안정성이 떨어져 불신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수익률 오르면 연금수령 기간 길어져
국민연금은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포트폴리오를 고수익, 고위험의 주식과 대체 투자(부동산, 사모펀드, 사회간접자본 투자 등) 중심으로 재편하는 작업을 진행해 왔다.
이에 따라 2002년 말 각각 93.4%와 5.8%였던 채권과 주식 투자의 비중이 지난해에는 채권 80%와 주식 17.5%로 바뀌었다.
지난해 '더 내고, 덜 받는' 방식으로 국민연금 제도가 바뀌어 다소 늦춰졌지만 2060년에는 기금이 고갈될 것으로 전망된다. 채권보다 일반적으로 수익률이 높은 주식 등에 투자함으로써 수익률이 높아지면 국민들이 연금을 받을 수 있는 기간이 늘어난다.
국민연금 측은 "기금운용 수익률이 연간 1%포인트 높아지면 기금고갈 시기를 5년, 연간 2%포인트 늘어나면 15년 연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6.86%였던 수익률을 7.86%로 높이면 기금고갈 시기가 2065년으로 늘고, 8.86%로 높이면 2075년으로 늦춰진다는 뜻이다.
●고위험 투자 우려도 적지 않아
주가가 폭락했던 올해 2월 22일 국민연금의 전체 자산 평가수익률은 미미한 수준이지만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로 떨어졌다. 당시 미국 경기침체 우려로 세계 증시가 동반 폭락한 가운데 코스피지수가 전 거래일보다 74.54포인트(4.43%) 급락했기 때문이었다. 주식투자 비중이 전체 자산의 17%대로 높아지면서 발생한 일이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공무원 퇴직연금(캘퍼스)도 정보기술(IT) 버블로 세계 증시가 일제히 침몰하던 2000년 초부터 3년 연속(2000¤2002년) 기금운용 적자를 낸 바 있다. 캘퍼스는 자산의 56%(2007년 말 기준)를 주식에 투자한다.
이처럼 등락이 심한 주식투자의 비중을 크게 늘릴 경우 수익률이 떨어지거나, 최악의 상황에서는 손실이 나 연금고갈 시기가 앞당겨질 가능성도 있다.
서울여대 이준행 교수는 "주식과 대체투자를 늘리는 것은 세계적인 연기금들의 추세"라며 "하지만 주식투자와 대체투자에는 위험이 따르는 만큼 전문적인 식견을 갖춘 유능한 운용자가 투명하게 운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도 이런 점을 고려해 국민연금의 지배구조를 개선하기로 했다. 29일 정부는 한승수 총리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어 국민연금공단 산하 기금운용위원회를 7명의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상설위원회로 개편하고, '기금운용공사'를 설립해 자산 운영을 맡기는 내용의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증시, 기업지배구조에 광범위한 영향 미칠 듯
증시 관계자들은 외국인들이 팔고 나가면서 침체에 빠진 증시에 상당한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국민연금의 증시투자 확대는 증시의 안정성을 높이는데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외국인의 시가총액 비중은 2004년 4월 최고 44.12%까지 늘어난 데다 해외 금융시장 등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들락날락하면서 증시의 변동성을 높여왔다.
하나대투증권 양경식 투자전략부장은 "국민연금이 앞으로 70조원 정도를 증시에 투자한다면 최근 약 3년 간 외국인들이 팔고 나간 부분을 모두 메우고도 남을 것"이라며 "전체 증시에서 국민연금이 차지하는 비중도 크게 늘어날 것"고 말했다.
국민연금이 주식투자 비중을 늘리면 현재 한국 증시에서 3~4% 정도를 차지하는 국민연금의 비중이 10% 이상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국민연금이 규모가 크지 않은 한국 증시에서 '연못 속의 코끼리'같은 존재가 돼 쉽게 운신하기 어렵고, 특정 주식을 매각할 때 해당 주가가 급락하는 등의 부작용이 나타날 우려도 있다.
국민연금의 주식투자 증대는 한국의 금융회사, 대기업 등의 투명성을 높이는데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국민연금은 올해 3월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 회장과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이 현대자동차와 두산인프라코어의 주주총회에서 등기이사로 선임되는 데 대해 반대 의결권을 행사했다. 두 명의 회장이 각각 비자금 조성, 공금횡령 혐의로 사법처리됐던 것을 문제 삼았던 것.
경영권 교체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국민연금이 민영화될 은행 등 금융회사의 주주가 되고, 대기업에 대해서도 주식투자 비중을 계속 늘린다면 이들 기업의 지배구조에 미칠 영향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실제로 미국의 캘퍼스는 실적이 나쁜 기업 최고경영자(CEO)의 사임을 요구할 정도로 선진국에서는 기관의 입김이 세다.
한편 국민연금이 해외 투자은행(IB)에 대한 투자를 늘리겠다는 방침을 밝힘에 따라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부실사태의 여파로 크게 떨어진 미국의 금융자산에 대한 지배력을 키울 기회도 생길 것으로 보인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