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가 루머 → 불안심리 증폭 → 실물경제 악화 ‘충격파’

  • 입력 2008년 9월 3일 02시 57분


한은총재 “위기설 증폭된 것”이성태 한국은행 총재(오른쪽)가 2일 국회 경제정책포럼 주최 조찬 세미나에 참석해 ‘한국금융시장 진단과 전망’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안철민 기자
한은총재 “위기설 증폭된 것”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오른쪽)가 2일 국회 경제정책포럼 주최 조찬 세미나에 참석해 ‘한국금융시장 진단과 전망’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안철민 기자
위기설의 숫자 <1> 외환 보유액 2432억 돌파

한달전보다 43억달러 줄었지만

대만 이어 보유액 세계 6위 수준

한국은행이 2일 발표한 8월 말 현재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2432억 달러로 한 달 전보다 43억2000만 달러 감소했다. 금융당국이 외환시장 개입 강도를 낮추면서 월 기준으로 사상 최대였던 7월의 감소 폭(105억8000만 달러 감소)보다 줄었지만 4월 이후 5개월 연속으로 감소한 것이다.

다소 줄긴 했지만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대만(2909억 달러)에 이어 세계 6위 수준이며,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액(1400억 달러)이나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거론한 적 있는 적정 외환보유액(2100억 달러)을 넉넉히 웃돈다.

유동외채(만기 1년 이내 단기외채와 1년 안에 만기가 돌아오는 장기외채를 합한 것)가 6월 말 2223억 달러로 급격히 늘면서 외환보유액과의 차이가 200억 달러 수준으로 축소된 것을 지적하면서 “원-달러 환율 방어에 필요한 ‘실탄’이 부족해졌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정부 관계자는 “유동 외채만큼의 유동 채권이 확보돼 있으므로 외환보유액으로 이 채무를 한꺼번에 갚아야 하는 상황은 있을 수 없다. 외환보유액과 유동외채의 차이로 지불 능력을 가늠하는 것은 의미 없다”고 말했다.



정부 “문제 없다” 해명에도 외환위기 ‘악몽’ 탓 불씨 못꺼

광우병 괴담처럼 초기대응 미숙… “시장신뢰 회복이 해법”

■ 9월 위기설 확산과정

정부의 거듭된 해명에도 불구하고 ‘9월 위기설’은 이달 들어 이틀 연속 금융시장에 충격파를 던지고 있다. 출처도 불분명하며, 어떤 전문가도 자기 이름을 걸고 언급하지 않은 위기설이 ‘자기 충족적 예언’처럼 위기를 증폭시키는 것이다.

정부가 외환보유액이 충분하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시장에서는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지우지 않고 있다. 이른바 ‘양치기 소년 이펙트(효과)’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정부가 외환보유액을 부풀려 발표한 기억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초기 대응 과정에서 사태를 너무 안이하게 생각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광우병 괴담을 가볍게 생각하다 심각한 위기를 맞았던 경험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 증권가 루머서 확산된 위기설

위기설은 올해 초 증권가 루머 수준으로 시작됐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가 주택담보대출이 많은 한국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거나 정부가 환율을 방어하는 데 외환보유액을 축내 제2의 외환위기가 초래될 수 있다는 식이었다.

위기설은 이후 유포 과정에서 고유가 및 원자재 값 급등으로 악화된 경제지표를 배경으로 그럴듯하게 포장돼 갔다. 9월에 만기가 집중된 외국인 보유 채권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면서 달러 수요가 급증해 한국 경제에 심각한 외화 유동성 위기가 초래될 수 있다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위기설은 또 위기 자체에 대한 본질적인 분석보다는 위기를 슬쩍 언급하면서 결과적으로 부추기는 금융권의 일부 보고서와 또 이런 보고서들을 비판 없이 전달하는 일부 국내외 언론 등을 통해 무비판적으로 확장돼 왔다. 위기설을 정색을 하고 실명으로 주장하는 경제전문가나 시장 관계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정부가 “위기설로 이익을 보는 세력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도 이런 측면에서다.

일각에서는 주식을 빌려서 판(대주거래) 외국인 투자자들이 주가를 떨어뜨리기 위해 위기설을 퍼뜨리고 있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다. 대주거래는 주식을 빌려 판 다음 주가가 떨어졌을 때 싼값에 사들여 주식으로 갚는 투자방식이다.

○ 정부 신뢰 상실도 위기설 키워

위기설이 사라지지 않고 금융시장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주요한 원인으로 전문가들은 정부에 대한 시장의 신뢰 상실을 꼽고 있다.

외환정책 등에서 정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서 경제 주체들이 정부의 공식적인 설명을 믿지 않고 사실보다는 유령 같은 소문에 판단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심리적 쏠림 현상이 나타나면 광우병 파동에서 벌어졌듯 괴담이 현실 세계로 뛰쳐나오게 된다.

상대적으로 개인투자자가 많아 소문에 민감한 한국 증권시장의 특성도 한몫을 하고 있다. 증권사도 고객에게 “환율이 더 오를 것 같으니 달러를 빨리 사라”고 권유하는 등 고객의 쏠림 현상을 부추기는 행태가 없지 않았다.

정부의 미숙한 초기 대응도 빼놓을 수 없다. 기획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조기에 대응했어야 하는데 지금 와서 보니 후회도 든다”며 “위기설이 너무 터무니없어 무시했었는데, 대응을 하지 않은 것이 위기설 확산을 방조한 것이 됐다”고 털어놓았다.

이와 관련해 한나라당 허태열 최고위원은 지난달 7일 최고위원회의에서 9월 위기설과 관련해 “아날로그 시절에는 괴담이 괴담으로 끝났는데 디지털 시대에는 괴담이 진실같이 통한다. 정부나 당이 가볍게 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바 있다.

○ 때만 되면 찾아오는 위기설

위기설이 나오면 즉각 분석하고 대응을 하기 때문에 위기가 좀처럼 실현될 수 없다는 게 정부의 일관된 주장이다. 위기설은 잘못 전망된 태풍처럼 일정 시기가 지나면 자연스레 사라진다는 설명.

육동한 재정부 경제정책국장은 “예를 들어 9월 위기설 다음에는 11월 위기설이 대기하고 있을 것”이라며 “과거 무수히 많았던 위기설의 운명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가장 최근인 2003년에도 신용불량자가 늘면서 카드채 부실이 커졌고 여기에 북핵 위기 고조, 이라크전쟁 발발,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 발생 등으로 ‘제2의 경제위기설’이 파다했지만 현실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지금의 위기설은 불안한 국제금융시장과 악화된 한국 경제 상황을 양분으로 웃자랐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상무는 “궁극적으로는 정부가 위기를 관리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시장에 주는 게 위기설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이라고 말했다.

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

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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