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딱지의 공포

  • 입력 2008년 9월 4일 02시 53분


경기가 부진하고 고가 주택 가격이 큰 폭으로 하락하면서 올해 들어 경매에 넘겨지는 감정가 6억 원 이상의 주택이 크게 늘고 있다. 지난달 28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집행관들이 경매에 나온 주택의 현황을 조사하기 위해 서울 강남구의 한 아파트를 방문한 모습. 박영대 기자
경기가 부진하고 고가 주택 가격이 큰 폭으로 하락하면서 올해 들어 경매에 넘겨지는 감정가 6억 원 이상의 주택이 크게 늘고 있다. 지난달 28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집행관들이 경매에 나온 주택의 현황을 조사하기 위해 서울 강남구의 한 아파트를 방문한 모습. 박영대 기자
《“법원에서 오셨다고요? 빚은 곧 다 갚을 건데요….”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H빌라.

집주인이 빚 2억9000만 원을 못 갚아 시가 10억 원의 집이 경매 대상 물건이 됐다.

서울중앙지방법원 김모(54) 집행관이 거주자 현황을 조사하기 위해 방문하자 집주인 남성은 겸연쩍은 듯 이렇게 말했다.

그는 낮은 소리로 “보증 한번 잘못 섰다 이렇게 됐네요”라고 말했다.

김 집행관은 경매 절차 확인 방법, 법원 담당부서 전화번호 등이 적힌 안내장을 전달했다. 》

강남구 동작구 관악구의 경매물건을 담당하는 김 집행관이 이날 방문한 주택은 모두 10채로, 이 중 7채가 강남구에 있었다. 시가 10억 원이 넘는 집도 4채나 됐다.

김 집행관은 동행 취재한 기자에게 “요즘 강남구에서 고가 주택이 경매에 부쩍 많이 나온다. 랜드마크로 꼽히는 타워팰리스의 아파트도 한 달에 2, 3채 이상 꾸준히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고가 주택엔 봉급생활자보다는 자영업자나 기업인이 주로 사는데 경기 침체로 사업이 어려워진 사람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 고가 주택을 샀지만 이를 감당하지 못해 집이 경매에 넘어가는 사례도 적지 않다.

○ 채권자 거주, 두 번째 경매 부쳐지기도

강남구 청담동 S아파트(시가 15억 원, 빚 10억 원)에는 집주인은 살지 않고 채권자인 40대 여성이 살고 있었다. 김 집행관은 보증금 및 월세를 확인했다.

“경매로 집이 팔리면 제가 받을 수 있는 건 얼마인가요? 최저 금액을 알고 싶어요. (경기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에 있는 주인집도 경매에 넘어갔나요?” 여성이 굳은 표정으로 연달아 질문했다.

일원동의 다가구주택(시가 12억 원, 빚 2억1800만 원)에도 주인이 없었다. 김 집행관은 “이 집은 올해 초 경매에 나왔는데 이번에 또 나왔다”며 “주인이 여러 사람에게 빌린 돈을 못 갚자 또 다른 채권자가 또 경매에 넘긴 것 같다”고 말했다.

일원동 M아파트는 시가로 15억 원이지만 빚이 13억 원이나 됐다.

법원 집행관은 경매물건을 직접 확인한 후 이른바 ‘빨간 딱지’(압류표)를 붙이고, 경매로 팔린 집에서 나가지 않는 사람들을 강제로 내보내는 ‘명도’ 업무 등을 한다. 과거 ‘집달리’로 불렸지만 ‘집달관’을 거쳐 ‘집행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 수십억 원 빌라 강제 퇴거시키기도

서울중앙지법(서울 강남 서초 동작 관악 종로 성북 중구 담당)이 올해 들어 명도 집행을 한 건수는 지난해보다 20%가량 늘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집행관은 “그만큼 극한 상황으로 치달은 사람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명도 집행은 두 번 정도 유예해주지만 그래도 나가지 않으면 집행한다”고 말했다.

이 집행관은 올해 5월 시가 30억 원가량인 역삼동 빌라에 대해 명도 집행을 했다.

“건설업체 사장인 집주인이 사채업자에게서 빌린 돈을 못 갚았어요. 명도 집행 날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인기척이 없어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갔지요. 그런데 사장의 부인만 몸이 아파 누워 있더군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지요.”

경매정보업체 지지옥션에 따르면 올해 들어 8월까지 서울지역 전체 주택경매건수는 4351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6134건)보다 29% 줄었다. 하지만 감정가 6억 원 이상 주택은 1199건으로 전년(818건)보다 47% 급증했다. 강남 서초 송파구의 6억 원 이상 주택도 538건으로 34%나 늘었다.

지지옥션 강은 팀장은 “부동산 대책이 연달아 나오고 있지만 시장에 반영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려 고가 아파트 시장의 침체는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고 말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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