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늘히 식은 ‘벤처의 꿈’

  • 입력 2008년 9월 12일 02시 57분


■ 벤처기업의 산실 KAIST 창업관 가보니

벤처캐피털 투자액 작년보다 11%나 줄어

신기술 있어도 “적자난다” 투자 퇴짜 일쑤

정부과제 따내 연명… 해외 창업 나서기도

대전 유성구 KAIST 캠퍼스 내 신기술창업관에 있는 환경기술 전문 벤처기업 에코프렌의 권선한 사장은 오수(汚水) 처리 기술을 개발하고도 투자를 받지 못해 관련 사업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권 사장은 오수 처리 기술을 개발한 뒤 3년을 공들여 몇몇 지방자치단체를 거래처로 뚫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관련 규정이 바뀌는 바람에 회사 자본금을 현재의 5000만 원에서 2억 원으로 늘리지 못하면 사업은 물거품이 된다.

그는 “벤처캐피털 등 기관의 투자 유치는 꿈도 못 꿀 일”이라며 “알음알음으로 개인투자자를 겨우 찾았지만, 성사 직전에 결정이 유보돼 암담하다”고 말했다.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가 얼어붙고 있다. NHN, 네오위즈, 핸디소프트, 아이디스 등 ‘스타벤처’의 산실(産室)인 KAIST 캠퍼스의 신기술창업관을 찾아 투자가 자취를 감춘 벤처 현장을 살펴봤다.

○“투자가 얼어붙었다”

11일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국내 벤처캐피털의 올해 상반기(1∼6월) 벤처 투자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1.3% 줄어든 4374억 원에 그쳤다.

벤처펀드 신규 결성액도 작년보다 20.5% 감소했다. 2002년 128개였던 창업투자사는 올해 7월 99개로 줄었다.

그나마 남은 투자는 학원 등 교육사업에 몰려 기술벤처가 체감하는 투자 냉각은 훨씬 심하다.

춘천생물산업벤처지원센터 소장을 거쳐 바이오벤처를 설립한 모신바이오텍의 신석봉 사장은 제품 개발 후 마케팅을 위한 자금을 투자받으려 했지만 창업 첫해와 이듬해 수천만 원의 적자를 봤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는 “창업 초기에는 적자가 날 수밖에 없는데 기술을 보지 않고 적자를 문제 삼는 것은 벤처기업에 아예 투자를 안 하겠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라며 한숨을 쉬었다.

KAIST 창업관의 벤처기업인들은 “일정 수준의 매출을 올리고 재무구조가 안정되지 않으면 벤처캐피털의 투자를 받을 가능성이 ‘제로(0)’”라며 “사업이 잘돼 돈을 빌릴 필요가 없어진 뒤에야 돈을 빌릴 자격이 갖춰지는 ‘엇박자 구조’”라고 지적했다.

이광형 KAIST 교수는 “벤처캐피털이 기술의 옥석을 구분해 투자할 능력이 없는 게 문제”라며 “그러다 보니 이미 성장한 회사들에 배수 낮은 투자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 생계형 벤처, 벤처 이민도 등장

투자 유치를 통한 성장의 기회가 사라지다 보니 지식경제부, 중소기업청 등 정부의 연구개발(R&D) 과제를 수행하며 연명하는 벤처가 늘어나고 있다. 이른바 ‘과제수행 전문 생계형 벤처’다.

한 벤처기업이 과제를 따면 이에 속한 세부 과제를 다른 벤처들이 다시 할당받는 ‘하도급식 과제 수행’ 행태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인 한국R&D프로젝트연구소 최남현 사장은 “대전지역 벤처 중 많게는 80%가 과제 수행에 기대어 연명한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며 “정부 R&D 과제는 상용화가 어려운 선도기술이기 때문에 실제 사업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아예 국내 투자 유치를 포기하고 해외 투자 유치나 해외 창업에 나서는 ‘벤처 이민’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KAIST 교수와 학생들이 창업한 한 벤처기업은 전 세계 기업들이 앞 다퉈 개발 중인 음성인식 기술을 개발해 이를 국제표준에 포함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현재 매출이 없다’는 이유로 국내 투자에 실패하자 미국행을 택했다.

벤처 창업 자체가 줄어드는 현상도 두드러진다.

KAIST 동문창업관, 신기술창업관 등에 입주한 총 92개의 벤처 중 KAIST 재학생 및 졸업생이 창업한 ‘KAIST 벤처’는 21개에 불과하다. KAIST 벤처가 전체의 40%를 넘었던 2000년대 초반과 비교하면 크게 줄었다.

대전=김용석 기자 nex@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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