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실리콘밸리에는 왜 한국인 스타 CEO가 없을까?

  • 입력 2008년 9월 13일 18시 27분


비주얼 컴퓨팅 분야의 세계적인 기업 엔비디아의 CEO 젠슨 황은 대만 출신이다.
비주얼 컴퓨팅 분야의 세계적인 기업 엔비디아의 CEO 젠슨 황은 대만 출신이다.
K그룹 피터 배 제2기 대표(오른쪽)와 염지원 씨.
K그룹 피터 배 제2기 대표(오른쪽)와 염지원 씨.
K그룹은 실리콘 밸리 내 한국계 벤처의 미래를 고민 중이다.
K그룹은 실리콘 밸리 내 한국계 벤처의 미래를 고민 중이다.
유튜브의 스티븐 첸
유튜브의 스티븐 첸
비주얼 컴퓨팅 분야의 세계적인 기업 '엔비디아'의 CEO는 대만계 중국인 젠슨 황(44)이다.

공동 창업자 가운데 한 사람인 그는 현재 8조 원 대의 가치를 지닌 엔비디아의 지분 4.7%(약 4000억원)를 소유한 '벤처 갑부'다. 지난해에는 미국 포브스지가 선정한 '가장 높은 연봉의 CEO' 61위에 선정될 정도로 실리콘 밸리에서 널리 알려진 스타 기업인이다.

대만 출신 인재들이 '세계 IT 수도'인 미국 실리콘 밸리에서 거둔 성과는 눈부시다.

'야후'의 창업자이자 현재 글로벌 CEO인 제리 양(40), 2006년 1조550억원에 '유튜브'를 구글에 팔아 순식간에 실리콘 밸리의 '워너비'로 떠오른 유튜브 CTO 스티브 첸(30)도 모두 대만계다.

제럴드 수(60) 미디어브로드 회장도 2002년까지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받은 CEO로 '중국인'의 자부심을 드높인 대만계 중국인. 이 밖에도 적지 않은 대만계 IT 경영자들이 실리콘 밸리를 무대로 모국 IT산업의 든든한 힘이 되어주고 있다.

대만 출신만 이 정도니 같은 '화교(華僑)'권으로 분류되는 홍콩, 싱가포르는 물론이고 중국 본토 출신 CEO들의 활약 역시 두말하면 잔소리다.

이 밖에도 실리콘 밸리에서는 유태인계, 인도계, 러시아계 스타 CEO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왜 유독 'IT강국' 한국은 실리콘 밸리에서 성공한 인물을 배출하지 못한 걸까.

●실리콘 밸리 스타가 된 한국인이 없는 이유

"거의 없다고 봐야죠. 나스닥(NASDAQ)에 상장된 수 천 개 기업 가운데서도 한국인 CEO로 성공한 기업은 없다고 봅니다. 얼마나 성공사례가 없으면 '실리콘 밸리 진출 30년 만에 성공한 한국벤처는 'SAMSUNG' 하나뿐'이라는 자조 섞인 표현이 나오겠어요."(실리콘 밸리 K그룹 피터 배 대표)

K그룹(www.bayareakgroup.org)은 지난해 초 실리콘밸리 인근에 거주하는 한국인 기술인과 과학자들 30여명으로 시작해 지금은 700명 회원으로 성장한 한국인 커뮤니티. 피터 배(41·한국명 배정융) 대표는 실리콘 밸리에서 한국계 CEO가 배출되지 못하는 상황이 구조적 문제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일단 실리콘 밸리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숫자가 중국계나 인도계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시장조사에서 시작해 회사를 세우고, 엔젤 투자를 받아 나스닥에 상장시켜 유능한 CEO를 모셔오는 일련의 성공을 일궈낸 선배가 부족하고, 그 성공 노하우가 후배들에게 전수되지 않는 것이 근본적 문제라고 할 수 있어요."

이제까지 한국계 IT벤처 스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 때 야후에 장착됐을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새롬의 다이얼패드, 2000년 7억 달러에 팔린 마이사이몬닷컴(양민정 사장)이 있었다. 1998년 루슨트에 10억 달러에 매각된 유리시스템즈(김종훈 사장)도 주목받은 벤처 스타였다. 그러나 한국계 벤처들은 한 번 반짝한 데 그치고 말았다.

●중국과 인도의 성공 비결

반면 중국과 인도는 거대한 조직이 벤처의 성공을 뒷받침하고 있다.

실리콘 밸리의 중국 벤처인들은 중국과학기술인협회(CSEA)로 집결한다. 회원수만 6000명을 헤아리는 거대한 기구다.

인도 기업인은 인도경영자모임(TIE· The Indus Entrepreneurs)으로 집결한다. 실리콘 밸리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막강한 자금력과 정치력을 갖춘 모임이다.

이 모임들을 통해 신생 벤처기업인들은 '세금을 어떻게 피해갈 것인지' '전문 CEO는 어떻게 영입해야 하는지' 등 회사 운영에 필수적인 조언들을 수시로 받는다.

이 같은 모임에서 전수되는 것은 지식뿐만이 아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비슷한 아이디어라면 모국 출신의 후배들에게 자금이 집중되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4년 전 미국 와튼스쿨에서 MBA를 마치고 실리콘 밸리에 정착한 염지원(34)씨는 "아무리 다인종의 미국 사회라고 할지라도 인도 출신이 많은 회사에서는 인도인이 관리자로 승진하고, 중국계 기업 역시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그 같은 결속을 바탕으로 현재 실리콘 밸리에서는 '유태인' '인도인' '중국인'의 '신(新) 삼국지'가 펼쳐지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에서도 유별나다는 한국인의 단결력이나 집단 근성은 왜 인도나 중국의 조직력에 미치지 못하는 걸까.

염 씨는 "한국인들의 모임은 단순 친목 수준에서 그쳐 오히려 한국 커뮤니티에 갇혀 살게 되는 측면이 있다"며 교류는 활발하지만 그 교류가 실질적 도움이 되지 못하는 현실을 꼬집었다.

"원래는 인도계나 중국계 모두 한국인 보다 국가관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가족만을 신뢰하는 저신뢰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실리콘 밸리에서는 이들이 유태인을 모방해 자신의 성공사례를 후배들에게 전수하더니 급속하게 성장해 버렸습니다. 거대한 지식과 자금의 커뮤니티를 구축한 거지요. 현재 실리콘밸리에서 인도 출신과 중국 출신은 성골로 대우 받습니다. 조금 기술이 부족하고 영어가 부족해도 쉽게 성공할 수 있다는 거죠."

한국인들도 30년 전부터 실리콘 밸리에 첨단 연구직을 중심으로 몰려들었다. 실리콘 밸리 인근에 거주하는 한국인만 해도 10만 여명에 달할 정도다. 그러나 단순한 기술 연구에 매달렸을 뿐 글로벌 리더십이 부족했다는 자성론도 있다.

"기술은 한번 팔면 끝나잖아요. 그러나 한 번 성공한 경험을 갖고 있다면 그 경험은 영원히 되팔 수 있습니다. 실패도 마찬가지에요. 그런 경험을 체계화해서 후배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체계적인 조직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입니다."(피터 배)

'엔비디아'의 젠슨 황 대표는 10대 시절 대만에서 미국으로 건너 온 온 1.5세대 이민자다. 현재 그는 일상적 기업 활동 이외에 중·미 관계 현안을 해결하는 '100인 위원회'의 회원으로 민족관련 업무 해결에 앞장선다. 일종의 대미 로비스트 역할까지 겸한 셈이고, 이 경험은 곧장 자신의 정치력으로 확장된다.

그러나 한국계의 경우 어정쩡한 교민회 이외에 이 같은 역할을 하는 최고 의결 기구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인 스타 CEO가 많이 나오기 위해서는 한국인이 이전보다 더 조직적으로 단결해야 합니다. 단순하게 '미국 주류사회로 진출하자'는 허황된 구호 보다는 성공한 후배들을 키우고 배려하는 건설적인 교민 문화가 절실한 시점입니다."

::베이에어리어 K그룹이란?

실리콘 밸리의 첨단기술 관련 분야에 근무하거나 공부하는 한국인들의 모임. 2007년 초에 결성돼 현재는 회원이 700여명 선에 이른다. 단순한 이민자들의 친목 모임이 아니라, 창업이나 투자, 인재공급 등 실질적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벤처 컨설팅그룹 역할을 1차 목표로 내세웠다. 나아가 한국계 벤처를 육성하고 엔젤 투자는 물론 실리콘 밸리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직으로 발전하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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