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발유 공급초과 심각… 국내업계 실적 악화 초비상
“정유업계에 ‘암흑시대(Dark Age)’가 도래했다.”
스위스계 투자은행인 크레디트스위스는 최근 ‘오일·가스·마케팅시장 분석 보고서’를 통해 정유업이 장기 불황기에 진입했다고 진단했다. 고유가의 최대 수혜업종으로 알려진 정유업계에 이 보고서는 충격적이었다. 특히 세계 최대 에너지기업인 미국의 엑손모빌이 6월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주유소사업 등 소매사업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한 뒤 나온 내용이어서 충격은 더욱 컸다.
엑손모빌은 올해 2분기(4∼6월) 사상 최대의 매출을 올리고도 정유 및 유통사업 등의 영업이익은 반 토막이 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불황의 조짐은 국내 정유업계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대한석유협회 관계자는 “정제마진이 악화되고 있는 데다 환율 불안에 따른 환차손 우려, 경기침체로 인한 석유수요 감소 등 삼중고(三重苦)가 이미 시작됐다”며 “장기 불황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고 말했다.
○ “정유업계 글로벌 암흑시대 진입”
크레디트스위스가 정유업 불황을 전망한 근거는 △석유수요 증가율 둔화 △고유가에 기인한 원재료비 상승 △원유공급 능력 제한 △정제공장 신·증설에 따른 정제마진 악화 등이다.
이 같은 악재(惡材) 때문에 정유업의 암흑시대는 이미 2분기에 시작됐으며 2012년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경기침체 때문에 휘발유 소비가 줄어들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인 미국에서는 내년 4분기(10∼12월) 중 대규모 정제공장 2개 정도가 추가로 가동될 예정이다.
아시아 시장에서도 중국과 인도 등을 중심으로 올해 말까지 7억 배럴(1일 생산능력 기준), 내년 말까지 14억 배럴 규모의 정제시설이 증설될 것으로 예상되는 데다 산유국도 대규모 정유 플랜트 건설에 나서는 상황이다. 이렇게 되면 휘발유 공급초과 현상이 심각해져 정제마진이 크게 악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때문에 비효율적인 정제시설이 폐쇄되거나 인수합병(M&A) 등으로 국제 정유시장이 재편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 국내 정유업계도 어려움 가중
국내 정유업계도 정제마진이 갈수록 악화돼 주름살이 깊게 파이고 있다.
정제마진은 원유를 수입한 뒤 정제해서 석유제품을 판매할 때 발생하는 차익. 정유업계에 따르면 배럴당 평균 10달러 안팎이던 휘발유 정제마진은 올해 7월 3.43달러, 8월 1.22달러 등으로 급감하고 있다. 이는 원재료인 원유와 이를 정제해서 만든 휘발유의 가격 차가 좁혀졌고 심지어 한때 역전되기도 했던 영향이 큰 것으로 분석된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지난달엔 흑자를 낸 정유회사가 별로 없었을 것”이라며 “3분기(7∼9월) 실적 전망도 매우 어려운 실정”이라고 전했다.
고유가와 경기침체 여파로 석유수요 자체가 줄고 있는 것도 정유업계의 고민거리다. 올해 들어 7월까지 전년 동기 대비 국내 석유제품 소비량은 매달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와 함께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 때문에 원-달러 환율이 오르는 것도 큰 부담이다. SK에너지 측은 “보통 원유를 구매한 뒤 2, 3개월 뒤 결제하기 때문에 현재의 환율 오름세가 지속되면 환차손이 발생해 실적 악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 정유업계 “고도화 설비로 승부수”
정유업계가 최근 내놓은 상반기 실적에서도 이 같은 불황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SK에너지의 상반기 매출액은 21조5590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6.8% 증가했지만 원유 구매 등에 사용된 매출원가는 19조9739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75.0% 급증해 매출원가 상승률이 매출액 증가율을 앞질렀다.
정유회사 가운데 영업이익률이 높은 에쓰오일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회사의 상반기 매출액 상승률은 63.6%이지만 매출원가 상승률은 67.3%였다.
이 때문에 정유회사들은 대규모 비용 절감운동을 벌이는 한편 고도화 설비 투자에 적극 나서고 있다. 고도화 설비는 저가(低價)의 중질유를 분해해 부가가치가 높은 석유제품을 생산하는 설비로 고유가 시대의 ‘지상유전’으로 불린다.
SK에너지는 약 2조 원을 투자해 올해 신규 고도화 설비를 완공한 뒤 상업생산에 들어갔으며 추가로 인천에 고도화 설비를 짓기 위해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GS칼텍스도 2010년 가동을 목표로 전남 여수에 2개의 고도화 설비를 건설 중이다.
차지완 기자 c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