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인촌상 특별부문 수상 이훈동 조선내화 명예회장

  • 입력 2008년 10월 3일 02시 58분


이훈동 조선내화 명예회장의 아호는 성옥(聲玉). 의재 허백련 선생이 ’목소리가 맑고 깨끗하다’고 지어주었다. 이 명예회장은 ”기업인은 게으름 피우지 않고 매사를 투명하게 처리하며 종업원을 가족처럼 아끼는 덕목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정승호 기자
이훈동 조선내화 명예회장의 아호는 성옥(聲玉). 의재 허백련 선생이 ’목소리가 맑고 깨끗하다’고 지어주었다. 이 명예회장은 ”기업인은 게으름 피우지 않고 매사를 투명하게 처리하며 종업원을 가족처럼 아끼는 덕목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정승호 기자
“빚 안지고 잘하는 한 길 걸어온 게 성공비결”

‘구십춘광(九十春光)’이란 말이 있다. 나이 먹은 노인의 마음이 청년같이 젊다는 뜻이다.

이훈동(91·사진) 조선내화 명예회장. 그는 구순(九旬)에도 열정을 가진 원로 기업인이다.

제22회 인촌상 특별부문 수상자인 그를 지난달 21일 조선내화 계열사인 전남 화순군 클럽900에서 만났다.

그는 고령인데도 강건해 보였다. 빨간색 바탕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넥타이가 감색 양복과 잘 어울렸다. 앉은 자세도 흐트러짐이 없이 꼿꼿했다. 이 명예회장은 먼저 인촌 선생 얘기부터 꺼냈다.

“선생은 기업가로서 언론과 교육 문화사업에 앞장서고 정치가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이런 길을 걸어온 선생을 평소에 흠모해 왔는데 그분의 유지를 기리는 상을 받아 더욱 기쁩니다.”

이 명예회장은 평생을 ‘내화물(높은 온도에도 견디는 비금속 재료)’이라는 한 우물만 판 기업인이다. 9개 계열사 대부분이 내화물 관련 회사다. 연간 3000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조선내화는 국내 내화업계 선두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가 내화물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2년. 16세 때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납석 광산 견습직원으로 채용된 그는 일본인 사장의 눈에 들어 3년 만에 광업소 지배인이 됐다. 1945년 광복을 맞으면서 광업소가 문을 닫자 그는 고향인 해남에서 농사를 지었다.

“솔직히 농사꾼으로 살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모두 털어 외국 여행을 가기로 마음먹었죠. 패전국이면서도 중화학공업이 발달한 독일과 일본을 꼭 가보고 싶었어요.”

그는 독일에서 공학계 인사를 만나 ‘공업 선진국일수록 내화물이 발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중요성을 알게 됐다.

귀국 후 광산 2곳을 운영하던 그는 6·25전쟁으로 공장과 창고, 기계 설비 대부분이 파괴된 조선내화화학공업주식회사를 1953년 인수했다.

“이때 내 인생을 걸었습니다. 확고한 신념이 있었고 사업전망도 밝아 보였기 때문에 광산에서 번 돈을 아낌없이 쏟아 붓고 재건에 나섰습니다.”

이 명예회장은 “30여 명의 사원과 1년 넘게 공장을 복구하면서 손마디마다 피멍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조선내화는 광산에서 나오는 양질의 원료를 적기에 공급받는 데 힘입어 도약의 기틀을 다졌다.

하지만 시행착오도 있었다. 1950년대 말 공장 현대화를 위해 독일에서 5만 달러를 주고 들여온 첨단설비가 가동을 할 수 없게 됐다. 독일 내화벽돌은 점토를 주원료로 하는 데 비해 한국은 납석을 위주로 하는 방식이어서 결국 기계를 벽돌공장에 싼값에 매각해야 했다. 이때 ‘수업료’를 톡톡히 치렀다.

1973년 포항제철(현 포스코)의 탄생은 조선내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제철소에 필요한 다양한 내화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면서 생산량이 크게 늘어나고 기술력이 축적됐다.

당시 일부 재벌그룹과 시멘트 회사가 내화물 시장에 발을 들여놓고 포철을 공략했는데 기술력과 충분한 원료를 확보하지 못한 탓에 발을 빼야 했다.

그는 “대기업을 물리치고 20년간 장기 독점 공급을 보장받았을 때 기업인으로서 큰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 명예회장은 은행 빚 없는 기업인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남의 돈을 갖다가 기업을 확장하고 세를 키우다 보면 결국 남의 회사를 키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외환위기 때 많은 기업이 쓰러지고 어려움을 겪었지만 조선내화를 비롯한 계열사가 끄떡없이 버텼던 것도 빚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1964년부터 1985년까지 21년 동안 목포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냈다.

“아마 전국 최장수 기록일 겁니다. 주위의 강한 권유도 있었고 목포의 현안 해결을 위해 중앙에서 뛰어줄 사람이 마땅치 않은 탓에 5대부터 11대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 명예회장은 회장 재임 시절 가장 보람있었던 일로 한국은행 목포지점 존치와 목포비행장 개항, 대불산업단지 조성을 꼽았다.

배우지 못한 것을 한(恨)으로 여겼던 이 명예회장은 기업이윤 사회 환원과 지역인재 육성을 위해 사재를 털어 1977년 성옥문화재단을 설립했다. 77억 원의 기금으로 지금까지 학생 4000여 명에게 32억 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그는 타고난 건강 체질이다. 요즘도 오전 5시 반에 일어나 체조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5년 전 골퍼들의 꿈인 ‘에이지 슈트’(18홀 라운드에서 나이와 같거나 더 적은 스코어를 기록하는 일)를 하기도 했다.

“기업가가 되지 않았다면 아마 소리꾼이 되었을 겁니다. 어려서부터 소질이 좀 있었고 역동적인 성격도 소리와 궁합이 맞는 것 같아요.”

그는 판소리를 기업 활동에 비유했다.

“판소리를 들으면 뼈저린 아픔의 세월이 느껴지고 덩실 춤이 절로 나오는 성공의 순간이 있어요. 기업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과 시련의 세월이 이어진 후에야 수확을 맛볼 수 있으니까요.”

그는 후배 기업인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문어발식’으로 기업을 확장하다 보면 어느 것 하나 경쟁력을 갖추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도 곤란을 겪는 기업이 한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신이 있고 잘할 수 있는 한 길을 가야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훈동 명예회장:

△1917년 전남 해남 출생

△1953∼1986년 조선내화 대표이사

△1964∼1985년 목포상공회의소 회장

△1978∼1982년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1981∼1991년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부의장

△1984년 국민훈장 모란장

△1986∼1989년 대한광업회 회장

△1986∼1999년 조선내화 회장

△1999년∼ 조선내화 명예회장

광주=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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