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느냐 죽느냐…중기 ‘은행 살생부’에 촉각

  • 입력 2008년 10월 24일 02시 56분


은행들 회생 가능성 따져 선별적 지원

중기 “등급 낮아 지원제외땐 사형선고”

전자부품을 만드는 A 중소기업의 김모 상무는 요즘 은행으로부터의 전화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이 회사의 키코(KIKO) 관련 손실액은 약 400억 원. 현재 일부 공장 시설을 확충하기 위해 공사가 진행 중이지만 은행에서 신규 대출을 해주지 않아 도중에 그만둬야 할 처지다.

김 상무는 “회사의 수익 및 재무구조는 아주 튼튼한데 재무제표에 아직 발생하지 않은 미래의 손실(키코 손실)이 반영되어 있어서 안 좋게 보이는 게 걱정”이라고 말했다.

중소기업과 건설사들의 관심이 은행에 쏠려 있다. 은행이 대출 지원 및 연장을 해주면 숨통이 트이는 거지만 거절당하는 경우엔 사실상 ‘사형 선고’이기 때문이다.

○ 회생 가능성이 최우선 기준

은행들은 금융위원회의 지침에 따라 중소기업을 A, B, C, D 네 그룹으로 나눠 상위 A, B그룹에 속한 중소기업에만 집중적으로 유동성을 공급할 예정이다. C에 속한 그룹은 워크아웃 절차에 들어가야 하고, 회생 가능성이 없다고 분류된 D에 속한 기업은 은행 지원을 받을 수 없다.

기업은행 남운택 여신담당 부행장은 “굳이 비유한다면 A등급은 돈을 조금만 대출해주면 잘 돌아갈 곳, B등급은 대출이 시급한 곳, C등급은 대출액이 굉장히 많아야 겨우 살 곳, D등급은 밑 빠진 독에 물붓기인 곳으로 보면 된다”며 “9000개 중소기업 중 A, B 등급을 받는 곳은 30∼50%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은행들은 A, B등급에 넣을 기업의 첫 번째 조건으로 ‘회생 가능성’을 보고 있다. 해당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술력이나 영업력을 보유한 기업으로 자금 지원을 해주면 무리 없이 회생할 수 있는지 여부다.

○ 제대로 된 심사 가능할까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KIKO 손실을 입어 은행에 유동성 지원을 신청한 중소기업 수는 189곳이지만 은행들이 우선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정한 곳은 30곳밖에 되지 않는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우리만 하더라도 KIKO와 관련해 손실을 본 업체 중 우선적으로 지원해줘야 하는 곳이 10여 곳인데 이들 업체의 손실분을 100% 대출해주면 700억 원으로 은행의 부담이 너무 커진다”고 말했다.

또 금융권과 중소기업 일부에서는 금융당국이 너무 급하게 대책을 쏟아내면서 이른 시일 안에 지원해 줄 것을 지시하는 바람에 평가할 시간이 없다는 불만도 나온다.

은행들마다 대출해 준 중소기업 수가 적게는 몇 백 개, 많게는 수천 개이기 때문에 등급을 나누는 데만 해도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금융당국이 워낙 강하게 ‘가시적인 성과’를 요구하고 있어 은행들도 무리하게 심사 과정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업체 수가 많다 보니 제대로 심사가 될지 의문이다”며 “재무제표 정도만 보고 끝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21, 22일 중소기업청이 키코 거래 기업 53개사를 대상으로 ‘중소기업 유동성 지원방안’에 대한 인식을 설문조사한 결과 ‘키코 손실 규모에 비해 지원 규모가 소액이고, 정확한 지침이 없어 불만족스럽다’고 답한 기업이 18개(33.9%)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

류원식 기자 rew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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