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 덜나도 취업 눈높이 낮추고 무리한 투자는 삼갈때
금융위기 속에서 시중 돈줄이 막히고 금리가 뛰자 가계의 고통이 커지고 있다.
실물 경기 침체에 이은 자산가치 하락과 소득 감소 등 ‘불황의 그림자’도 짙게 드리우고 있다.
금융 전문가들은 금융시장 불안이 진정되더라도 앞으로 닥칠 위험에 대비해 무리한 빚과 씀씀이를 구조조정하고 가정경제의 기초 체질을 다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빚의 경제’에 대한 복수
금융기관에 근무하는 김모(39) 팀장은 올해 5월 주택담보대출 1억5000만 원을 빌려 서울 노원구 상계동의 92.6m²(28평) 아파트를 3억6000만 원에 장만했다. 현재 김 씨는 대출 이자가 껑충 뛰면서 한 달에 100만 원 가까이 이자를 물고 있다. 그는 마이너스통장에서 매달 50만∼100만 원씩을 빌리고 있다. 김 씨는 “내년 월급도 동결될 것 같은데 아이들 사교육비에 생활비까지 늘어 걱정이 태산”이라며 “무리하게 빚을 내 집을 산 게 후회스럽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이후 10년간 한국 가계는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려 자산을 불리는 ‘빚의 경제’에 빠져 있었다. 국내 가계부채는 2008년 6월 말 현재 660조3060억 원.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도 1998년 37.9%에서 2007년 70%로 늘었다. 6월 말 기준 가계의 금융부채는 연평균 가처분소득의 153%로 미국 132%, 일본의 111%보다 높다.
반면 한국의 개인순저축률은 1998년 23.2%에서 지난해 2.3%까지 빠르게 떨어졌다. 소득이 통장에 들어갈 때의 일시적인 수준이어서 사실상 저축이 없는 셈이다.
부동산 등 자산 가격이 최근 몇 년간 크게 오르면서 생긴 ‘착시 현상’도 문제다. 소득은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난 10억짜리 부자’라는 생각에 빠져 자녀를 유학 보내고, 골프를 배우고, 빚내서 펀드 투자를 하는 문화가 형성된 것.
○돈 나갈 구멍부터 막아라
경제 전문가들은 앞으로 성장률 둔화-고용 및 소득 감소-가처분 소득 감소 및 환율과 금리 상승-이자비용 및 물가상승-소비여력 감소-가처분 소득 감소의 이중고를 겪게 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김창수 하나은행 재테크팀장은 “지금은 대출을 갚는 것이 최우선”이라며 “돈을 모아 한꺼번에 갚기보다는 조금씩이라도 빚을 줄여 나가는 게 좋다”고 조언한다.
천규승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정보센터 전문위원은 “총액으로 얼마를 한꺼번에 줄이겠다는 식보다는 교육비, 외식비, 문화생활비 등 항목별로 지출 우선순위를 정하는 합리적인 절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가계 소비지출에서 교육비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상반기 기준)은 2000년 4.9%에서 올해 6.2%로 해마다 늘고 있다. 국제유가 급등으로 가계의 교통비 지출 증가율도 올해 상반기(1∼6월) 11.4%로 2000년(13.3%) 이후 가장 큰 폭으로 늘었다.
○눈높이 낮춰 일자리부터 찾아라
직업이 없는 청년층은 눈높이부터 낮춰 일자리를 얻어야 한다. 불황이 끝나고 일자리가 늘면 취업 경험을 살려 더 나은 일자리로 갈아타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 정부가 경기 부양에 적극 나서고 있지만 내년 일자리는 20만 개 늘어나는 데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주식 부동산 등 금융자산 가치 하락은 고령층이나 연금 소득자에게도 추운 겨울을 예고하고 있다. 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정부에서 운영하는 노인고용센터 같은 제도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며 “고용이 활발히 늘기 어려워 개인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하나은행 김 팀장은 “자영업자들은 업종 내 경쟁이 극심하고 투자대비 소득이 적다면 폐업하고 빠지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며 “경쟁력이 있다면 무리한 투자보다 유동성을 많이 확보해 경기가 살아날 때를 기다리는 게 좋다”고 말했다.
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
류원식 기자 rew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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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무관리 깐깐하게 하되 시장재편 감안한 전략 병행
정부 대책 한 발씩 늦어… 감세 - 규제개혁 서둘러야▼
“칠흑 같던 터널 끝에 희미한 빛이 이제 막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터널을 벗어나기까지 남은 거리가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동응 한국경영자총협회 전무는 최근 회원사 동향을 파악한 뒤 현재 경기 상황에 대해 이 같은 진단을 내렸다. 한미 간 통화스와프 체결 이후 금융시장이 진정되는 기미가 있지만 금융위기가 실물경제로 번지는 조짐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년 경영계획을 마련 중인 기업들은 세계 금융위기와 경기침체가 수출 및 내수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번 경제위기를 통해 글로벌 시장이 재편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성장의 기회’를 모색하는 기업들의 노력도 곳곳에서 보이고 있다.
경제전문가들은 “위기 탈출을 위해 정부는 재정의 역할을 강화하고, 기업은 체질을 강화해야 한다”며 “위기 극복의 지름길은 활발한 기업 활동인 만큼 국민도 기업에 성원을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내년이 올해보다 더 힘들 수도
삼성, 현대·기아자동차, SK, LG, 롯데 등 국내 5대 그룹 및 주력 계열사들은 경기침체가 내년에 더 심해질 가능성이 높다고 걱정한다.
특히 반도체 불황의 장기화와 액정표시장치(LCD) 공급 과잉 사태로 어려움을 겪는 삼성전자의 내년 시설투자 규모는 올해(연결기준 12조 원)보다 적을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내년 재무관리는 보수적으로 할 계획”이라며 “경영 스피드를 높이고 투자 정확도를 높여 위기 속 기회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기아차는 글로벌 자동차시장이 소형차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만큼 이를 기회로 삼겠다는 전략이다. 현대·기아차의 중소형차 판매 비중은 전체의 절반을 넘는다.
SK도 주력 계열사의 사업이 유가와 환율, 금리 등 경제지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탓에 적잖은 타격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수출 확대와 내실경영 등으로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방침이다.
LG전자는 가전분야 소비 위축이 가시화하고 있다고 보고 현금흐름 개선, 불요불급한 자산 매각 등을 통해 유동성을 확보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롯데 관계자는 “주력부문인 식음료사업은 국내 소비가 둔화할 것으로 보여 중국과 러시아 등 해외 법인과 공장을 설립해 판로를 확대하는 방안을 모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위기 탈출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동아일보는 황인학 전국경제인연합회 상무, 이현석 대한상공회의소 전무, 이경태 한국무역협회 무역연구원장, 조유현 중소기업중앙회 정책개발본부장, 이동응 경총 전무 등 경제5단체 임원에게 ‘위기 탈출을 위한 제언(提言)’을 요청했다.
이들은 △정부 재정의 역할 강화 △감세(減稅) 법안의 조기 시행 △기업투자 확대를 위한 규제개혁의 지속 추진 등을 공통적으로 꼽았다.
황인학 상무는 “실물경제의 위축을 막기 위해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를 포함한 재정지출을 늘릴 필요가 있다”며 “민간의 가처분소득을 늘리기 위한 감세 조치도 가능한 한 빨리 시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현석 전무는 “정부 대책이 ‘한발씩 늦다’는 느낌이 있는데 앞으로는 대책을 미리 마련해 선제적으로 내놔야 시장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동응 전무는 “경영 안정을 위한 선결과제가 노사안정”이라며 “노사관계에서 정부는 법과 원칙을 확실히 적용하고, 노조도 국민경제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밝혔다.
이경태 원장은 “무역수지 개선에 수출이 무엇보다 중요한 만큼 정부는 수출금융을 확실하게 지원해야 한다”며 “중소 수출기업도 외환 등 리스크 관리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하는 시기”라고 당부했다.
조유현 본부장은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 공정경쟁 질서를 구축하고 상생(相生)협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들은 사회 일각의 반(反)기업정서도 기업친화적 시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경제5단체가 올해 ‘기업가정신 주간’ 행사를 개최하는 것도 반기업정서가 위기 극복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산업부 종합
정리=차지완 기자 c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