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대란 다시오나]<上>거리 내몰리는 비정규직

  • 입력 2008년 11월 11일 02시 58분


“매출 떨어진만큼 해고”… 잠 못이루는 시한부 봉급쟁이들

기간제 줄었지만 여건 더 나쁜 시간제 - 용역은 증가

기업선 “단순업무직 정규직 전환은 부담 커” 하소연

‘사회적 취약층 몰락 → 내수붕괴 → 침체’ 악순환 우려



《1년 전 은행에 계약직 사원으로 입사한 이모(26·여) 씨는 12월 초 재계약 심사를 앞두고 밤잠을 설치고 있다. 2006년 2월 서울의 상위권 대학을 졸업할 때만 해도 자신이 비정규직이 될 줄은 몰랐다. 그는 “계약기간이 3년쯤 된 계약직은 요즘 대부분 (은행을) 나가는 것 같다”며 “지점장이 ‘이번엔 더 많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해 긴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근로자에게 유난히 추운 겨울이 닥치고 있다. 기업들이 다가올 경기침체에서 살아남기 위해 비정규직부터 손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내년 7월부터 본격 적용되는 비정규직 보호법은 보호는커녕 이들을 거리로 내모는 역할을 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의 박종남 조사2본부장은 “내년부터 실물경제가 더 나빠진다는 예측이 많아 비정규직법이 비정규직의 고용을 불안하게 하는 측면이 더 커졌다”고 지적했다.

○ 비정규직 근로자의 매서운 겨울나기

6월부터 경기 수원시의 한 가전제품 대리점에서 판매사원으로 일하는 김모(27) 씨도 같은 처지다. 김 씨는 9월 들어 가전제품 판매가 부쩍 줄자 자신도 모르게 주인 눈치만 살피고 있다. 매장 판매사원 5명 중 1, 2명은 줄인다는 얘기가 돌고 있기 때문이다.

기간제 근로자뿐만이 아니다. 파트타임 근로자나 건설현장의 일용직 노동자도 일자리를 찾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3분기(7∼9월) 건설투자는 지난해 3분기보다 0.9% 줄었다.

근로자 사정이 어려워진 것은 기본적으로 이들을 고용하는 기업 사정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경남 창원시의 한 기계제조업체의 전체 사원 400명 가운데 20명이 비정규직이다. 그동안 20명을 파견받아 2년간 고용한 뒤 평가실적이 좋은 10여 명은 정규직으로 전환해 왔지만 올해부터는 다른 파견직원으로 교체하거나 자체 계약직으로 채용하기로 했다.

회사 관계자는 “주문량이 줄고 재고가 늘고 있는 마당에 직원들을 추가로 정규직화하기엔 부담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

한 보험중개업체 사장은 전화상담업무를 아웃소싱하기로 했다. 회사 사장은 “상담직원을 정규직화하면 고용보험 등 4대 보험 비용으로 30%의 추가 인건비 부담이 생긴다”며 “비정규직 보호법 때문에 되레 이들을 내보내게 됐다”고 불평했다.

한 대기업 인사담당 관계자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면 해고가 어렵고 호봉제에 따라 임금이 계속 올라가 부담이 크다”며 “가뜩이나 경기 침체가 예상되는 시기에는 대부분 기업이 정규직 전환을 꺼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혼율 증가 등 사회해체 현상 우려도

통계청에 따르면 8월 기간제 근로자는 236만5000명으로 전체 임금근로자의 15%에 이른다. 이들을 해고하면서 촉발된 인력 구조조정 분위기가 사회 전체로 확산되면 한국 경제는 심각한 내수 위축과 경기 침체의 악순환을 맞을 수 있다.

또 사회적 취약계층의 일자리 감소는 이들의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허물면서 자살률, 범죄율, 이혼율이 증가하는 등 사회해체 현상을 초래할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뚜렷한 해법은 없다. 동아일보와 대한상의의 공동 설문조사 결과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 어려운 이유에 대해 “비정규직 업무가 단순·보조적이거나 일시적이어서”라고 응답한 기업이 전체 278곳 중 150곳(54%)으로 가장 많았다. 인건비 부담이 커서(22.3%), 해고가 어려워지므로(14%) 등의 응답이 뒤를 이었다.

기업들은 또 해고하는 비정규직의 일자리를 △다른 비정규직 근로자로 대체(39.7%)하거나 △외주 용역 등으로 해당 업무를 전환(20.6%)할 계획인 것으로 나타났다. 남은 인력에 일을 나눠 맡기겠다는 응답도 20.6%였다. 비정규직이 맡고 있는 업무가 단순 노동이 많아 굳이 정규직으로 전환할 이유가 없고, 이에 따라 이들은 경기불황에 극히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비정규직법을 개정한다면 어떤 방향이 좋겠느냐는 질문에 기업의 절반가량은 “기간제 근로자의 사용 기간을 기업과 근로자의 자율 합의나 계약에 맡겨야 한다”(49.7%)는 방안을 지지했다. “사용기간 제한을 현행(2년)대로 유지하자”는 방안에는 14.3%, 정부가 추진 중인 “3∼4년으로 늘리자”는 방안에는 15.9%가 찬성했다.

반면 노동계는 사용기간 제한을 오히려 줄이자고 주장하고 있다. 내년 초에 당장 닥칠 해고대란을 막으려면 노사정 간의 합의가 시급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정규직화 별도직군 편입해 고용 보장받지만 급여차등

외주전환 사실상 해고… 노사간 극심한 대립 겪을수도

계약해지 영세기업들 소리없는 대량해고 사태 가능성

■ 비정규직 세갈래 길

지난해 7월 비정규직보호법 시행에 따른 기업의 대응을 분석하면 크게 △정규직화 △외주화 △해고 등 세 가지로 분류된다.

세 가지 시나리오는 동시에 진행됐다. 통계청에 따르면 비정규직보호법 시행 전인 2007년 3월부터 올해 8월까지 비정규직은 32만8000명 줄었고 정규직은 70만 명 늘었다. 비정규직보호법이 비정규직을 줄이고 정규직을 늘렸다고 풀이되는 대목이다.

또 같은 기간 비정규직 중 기간제 근로자는 줄었지만 더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시간제, 용역직 근로자는 늘었다. 기간제 근로자의 일부는 정규직이 됐지만 근로조건이 나빠진 경우도 많음을 보여 준다.

정규직화의 대표적인 사례는 우리은행이다. 우리은행은 지난해 3월 비정규직 행원 3076명을 정규직군으로 편입했다. 비정규직 근로자를 별도 직군으로 편입해 급여에 차등을 두는 대신 고용을 보장하는 방식이었다. ‘우리은행 모델’은 정규직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임금을 동결하고 절감분을 전환 비용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일부에서는 직군 간 이동이 원활하지 않고 급여도 기존 정규직의 70%에 불과하다는 점을 들어 이 모델이 ‘중(中)규직’ 전환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기업의 부담을 줄이면서 고용 안정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은행은 대부분 비슷한 방식을 택했다.

이랜드는 외주화 및 해고 과정에서 노사 간 극한 대립을 겪은 경우다. 지난해 6월 이랜드그룹 계열 유통업체인 뉴코아, 홈에버가 비정규직을 외주업체로 내보내는 형태로 해고하려 하자 정규직 노조가 반발하며 매장 점거에 들어갔다. 불매운동, 농성과 고발이 이어졌다.

결국 홈에버는 홈플러스에 인수됐고 뉴코아는 올해 8월에야 비정규직 직원 전원을 재고용하기로 하면서 400여 일 동안 계속된 노사분규를 끝냈다.

우리은행 모델이 이랜드 모델보다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기업이 져야 할 과중한 부담 때문에 모든 기업에 이를 요구할 수 없다는 현실적 한계도 있다.

한편 비정규직보호법 시행이 확대되면서 기업들이 어느 모델을 선택하는지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지금까지의 통계를 보면 비정규직법이 기간제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향상시키거나 또는 시간제 근로자로 악화시키는 두 갈래 효과는 관찰되지만 해고로 이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반면 노동부 관계자는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직원 100명 미만인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소리 없이 해고되는 경우가 많아 대량 해고 사태가 올 수 있다”고 말했다.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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