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투자은행(IB) ‘리먼브러더스’의 파산보호 신청 이후 정부와 한국은행은 금리를 파격적으로 인하하고 금융기관에 달러와 원화 자금을 공급하는 응급처방에 나섰다. 하지만 한국의 외환위기 때처럼 은행에 공적자금을 투입해 일부 은행 국유화까지 단행한 미국 영국 정부와 한국의 대응 강도에는 차이가 있다.》
2005년부터 본격 경쟁… 시중銀 총자산 654조 → 873조
예대율 상승 등 건전성 악화… 경기침체 땐 타격 불보듯
제동 못건 금융당국-유동성 방치 한은도 책임 못면해
‘9·15 리먼브러더스 부도’ 이후 국내 은행들에 대한 ‘위기론’이 수시로 나오면서 우리나라 은행이 정말 취약한지, 취약한 점이 있다면 과연 누구의 책임인지 하는 논란이 계속 불거지고 있다.
외화 및 원화 유동성 위기는 넘겼지만 2005년 이후 대출을 급격히 늘리며 외형 경쟁을 한 후유증으로 대출 건전성과 수익성이 조금씩 나빠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의 직격탄을 맞은 선진국 은행들보다는 나은 상황이지만 세계 경제가 악화되면 어떻게 될지도 불안하다.
금융 전문가들은 대출을 통한 몸집 불리기에 치중한 은행들, 이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한 감독당국, 유동성을 관리하지 못한 한국은행 모두가 일정한 책임이 있다고 지적한다.
○ 주택담보대출 급격히 증가
2005년경부터 시중은행들의 주택담보대출은 급격히 증가했다. 아파트 값이 급등하자 많은 사람이 앞 다퉈 은행에서 돈을 빌려 집을 샀기 때문이었다.
몸집을 불리고 싶어 하던 은행들에는 좋은 기회였다. 은행 외형(총자산)은 대출을 늘리면 커진다. 당시 총자산 규모에서 국민은행 등에 밀린 우리은행은 특히 공격적으로 주택담보대출을 늘렸다. 국민, 신한, 하나, 기업은행 등도 바로 뒤를 따랐다.
2006년 3월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 등을 도입한 ‘3·30 부동산대책’이 시행된 이후 가계대출 확대가 한계에 이르자 은행들은 중소기업 대출을 늘렸다.
그 결과 국내 시중은행들의 총자산은 2004년 말 654조 원에서 3년 뒤인 지난해 말 873조 원으로 33% 증가했다. 같은 기간 우리은행의 총자산은 105조 원에서 188조 원으로 79%나 늘었다.
○ 3년 뒤 나타나는 후유증
하지만 은행예금은 대출만큼 늘어나지 않았다. ‘예금액 대비 대출액 비중’을 뜻하는 예대율은 급속히 높아졌다.
2005년 말 103.12%였던 시중은행들의 평균 예대율은 올해 6월 말에는 127.08%로 상승했다. 부족한 돈은 예금보다 조달비용이 비싼 은행채, 양도성예금증서(CD)를 팔아 메웠다. 수익성은 나빠질 수밖에 없다.
평균 3년인 ‘거치 기간’ 때문에 대출 확대에 따른 부작용은 3년 뒤에 나타난다. 올해 9월 말 시중은행들의 부실채권비율은 0.81%로 지난해 말의 0.72%보다 높아졌고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은 10.79%로 지난해 말의 12.31%보다 떨어졌다.
이 같은 지적에 반론도 만만찮다. 황영기(현 KB금융지주 회장) 전 우리은행장(2004년 3월∼2007년 3월)은 “행장들이 당시 시장 여건에 맞춰 열심히 한 것을 비판하면 누가 남들과 다르게 새로운 일을 하려 하겠느냐”면서 “연체율 등에서 우리은행 상황이 나쁘지도 않다”고 말했다.
○ 금융당국, 한은의 역할에도 비판 제기
금융당국에 대한 비판도 있다.
윤증현 전 금융감독위원장 겸 금융감독원장(2004년 8월∼2007년 8월)은 “당시 외형 경쟁의 위험성을 여러 차례 경고했지만 은행들이 지금과 같은 위기상황을 평시에 대비하는 게 쉽지 않았던 것”이라며 “은행 문제에 대해서는 감독당국, 중앙은행도 책임을 공유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은이 낮은 금리를 유지해 유동성이 넘쳐나게 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2004년 11월부터 2005년 10월까지 한은 기준금리는 사상 최저 수준인 3.25%였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2002년 4월∼2006년 3월)는 “당시에는 경기침체 속에서 부동산 등 자산 가격이 상승했기 때문에 한은으로서는 양자택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지금 국내 은행들의 건전성에 큰 문제는 없으며 조선업과 해외투자펀드의 환헤지에서 발생한 외화차입 문제가 은행들이 겪는 문제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경제 전문가들은 아직까지 최악의 상황이 닥치지 않은 만큼 지금이라도 지난 몇 년간의 문제점을 분석해 제대로 대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국경제연구원 배상근 선임연구위원은 “은행의 과도한 외형경쟁 문제를 해결하려면 은행장들을 단기 실적에 매달리도록 만드는 ‘3년 임기제’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
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
■ 한국 대응, 美-英과 ‘온도 차’
▼美 - 英 파격적 조치로 연쇄도산 진화
한국 “상황 다르다” 구제금융엔 신중▼
한국 정부는 금융 및 실물 침체가 지속되면서 개입 범위와 대책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금융기관의 연쇄 도산과 ‘뱅크 런(예금 인출 사태)’ 현상이 나타난 미국 유럽과는 다르다”고 강조하고 있다.
○ 세계 각국 ‘돈줄 풀기’ 공조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세계 각국 정부는 금융시장의 ‘연쇄도산 공포’를 진화하는 파격적 방안을 잇달아 내놓았다.
특히 미국과 유럽 각국 정부는 우선 은행 간 거래에 대해 정부가 지급 보증을 해주고 예금보장 한도와 기간을 확대했다. 미국 머니마켓펀드(MMF)의 일부 환매 사태 등 ‘뱅크 런’ 조짐이 보이자 사전에 불안감 해소에 나선 것.
유동성 공급도 함께 이뤄졌다. 미국 등 주요국 중앙은행은 지난달 말 금리를 한꺼번에 0.5%포인트 끌어내리는 국제 공조에 나섰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지난달 두 번에 걸쳐 금리를 모두 1%포인트 내렸다. FRB는 2573억 달러의 기업어음(CP)을 매입해주는 방식으로 기업이 자금을 조달하는 채권시장에도 ‘뒷돈’을 댔다.
이 밖에 미국과 유럽 정부는 공적자금을 투입해 부실 금융기관의 지분을 매입하고 부실 자산을 인수하는 구제금융에도 나섰다.
○ “금융기관-기업 부실 크지 않아”
한국 정부와 한국은행도 지금까지 총 550억 달러의 외화 유동성을 공급하는 한편 미국과 300억 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 협정을 체결했다. 은행의 대외채무에 대해 1000억 달러까지의 지급 보증도 서 주기로 했다.
한은은 또 기준금리를 10월 9일 이후 세 번에 걸쳐 1.25%포인트 파격적으로 인하했다. 환매조건부채권(RP) 매매 방식으로 증권, 자산운용사에 2조 원을 풀고 은행채도 매입하기로 했다.
하지만 은행에 대한 직접적인 공적자금 투입 부분에 대해 한국은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 은행들의 외국인 주주 비중도 높아 섣불리 꺼냈다간 외국인 투자가의 이탈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도 금융당국이 우려하는 부분이다.
부실대출 증가로 건전성이 훼손된 은행이 자기자본비율 등을 높이기 위해서는 자본 확충이 필요한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자기자본비율이 낮다 보니 대통령의 잇따른 중소기업 대출 독려에도 은행이 꿈쩍하지 않았던 것. 이런 점 때문에 금융당국은 우선 은행들에 후순위채 발행을 통한 보완자본 조달, 증자. 배당 유보 등을 통해 자본금을 확충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전효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한국은 유동성이 문제지 금융기관과 기업의 부실은 크지 않아 구제금융을 당장 투입할 단계는 아니다”라면서도 “내수 침체가 길어지고 기업 구조조정이 더뎌 금융기관 부실이 커지면 대책의 강도를 높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