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마다 “경영 어렵다…” 명예퇴직 통해 감원
일감 크게 줄어들자 “알아서 쉬라” 휴가 보내
전기 끊긴 회사로 나온 직원들도 일손 못잡아
18일 오후 국가산업단지인 인천 남동구 고잔동 남동공단 내 T사.
47억 원을 결제하지 못해 4일 최종 부도 처리된 이 회사의 생산설비는 가동을 멈춰 정적이 감돌았다. 전기요금을 체납해 지난주 전기가 끊긴 데 이어 이날은 상수도 공급도 중단돼 수돗물까지 나오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게 된 직원 가운데 일부는 출근했지만 일손이 잡히지 않는 듯 어두운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보였다.
2003년 설립된 이 회사는 주로 건설회사가 아파트를 지을 때 주방과 현관에 필요한 시스템가구를 대규모로 납품해 왔다. 지난해 매출액은 446억 원.
2006년까지 흑자가 났지만 지난해 23억 원에 이르는 적자를 낸 데 이어 올해 건설경기 침체에 따른 자금 압박에 시달려오다 결국 문을 닫게 됐다.
인천상공회의소 관계자는 “이 회사의 임직원 70여 명도 문제지만 100여 곳이 넘는 소규모 협력업체도 밀린 결제대금을 못 받게 돼 연달아 부도 위기에 놓였다”고 말했다.
경제 불황이 장기화하면서 전국 산업단지 공장들의 부도와 휴폐업이 속출하고, 회사마다 감원의 칼바람이 부는 등 매서운 경제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공장과 산업단지 관계자들은 “체감경기는 외환위기 때보다 오히려 더 안 좋은 것 같다”며 “연쇄도산을 막기 위해서는 정부와 금융권의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 세계 불황 ‘발등의 불’
연간 19만 t의 에틸렌과 프로필렌을 만드는 이 공장이 가동을 중단한 것은 1962년 창사 이후 46년 만에 처음이다.
회사 관계자는 “수요 감소로 시황이 나빠지면서 수출용 가격이 너무 낮아 공장 가동을 중단했지만 세계 경기가 좋지 않아 언제 재가동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울산의 3대 주력산업인 조선 자동차 석유화학업종은 불황의 여파로 공장 확장 계획을 유보하거나 공장 가동을 잇달아 중단하고 있다.
현대미포조선은 울산 울주군 온산읍 강양리 일원 공유수면 32만 m²를 매립해 선박 블록 생산 공장을 조성하려던 계획을 전면 취소했다. 현대중공업도 강양리 일원 40여만 m²에 조성하려던 해양플랜트 공장 신설 계획을 지난달 취소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 후보의 당선으로 울산의 자동차업계도 비상이 걸렸다.
울산의 최대 수출품목 가운데 하나이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최대 수혜 품목인 자동차 분야에 대한 재협상이 이뤄질 경우 울산 경제는 적지 않은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울산시는 주봉현 정무부시장을 단장으로 한 기업지원단과 박맹우 시장이 최근 잇달아 기업체들을 방문해 애로사항을 청취하고 지원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 입주기업 가동률 갈수록 낮아져
부산 사상구 자동차 부품 생산업체 L사와 W사는 지난달부터 공장 가동률이 50%에도 미치지 못하자 급한 물량만 처리하고 나머지 직원들은 휴가를 보내고 있다.
현대차에 엔진부품을 납품하는 부산 기장군의 E사는 이미 9월 1차 구조조정을 통해 40여 명을 명예퇴직시켰고, 추가로 2차 구조조정을 고려 중이다.
부산지역 최대 자동차 부품업체인 금정구 두구동 S&T대우(구 대우정밀)도 연말부터 내년 1월 초까지 조업을 중단할 예정이다.
울산종합고용지원센터에 따르면 울산에서는 최근 한 달 사이 기업체 15곳이 휴업했고, 현재 휴업을 고려 중인 업체도 30곳에 이른다.
부산의 신발업체 S사가 지난달 31일 부산지법에 화의를 신청하는 등 지난달에만 부산지역 9개 업체가 화의를 신청했다.
광주 하남산업단지에서는 최근 대기업에 전자제품용 고무를 납품하는 중앙티엔시가 폐업신고를 하며 가동을 중단했고, 지난달에는 목재 창틀제조 업체인 평화공업과 김치냉장고 부품을 납품하는 대현산업이 부도 처리됐다.
수도권 반월, 시화공단에서는 아직 기업들의 ‘연쇄 도산’ 현상은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가동업체 수 및 가동률의 감소 추세가 빨라지고 있다.
반월공단의 경우 가동업체가 8월 3389개였다 9월에는 3359개로 감소했고, 시화공단은 생산능력에 따른 생산실적을 계산한 전체 입주기업의 가동률이 7월 81.6%, 8월 81.1%, 9월 78.8%로 계속 낮아지고 있다.
경남 창원산단의 중소기업이 몰려 있는 팔룡단지 내 공작기계업체인 A사는 최근 일감이 없어 40여 명의 직원 대부분을 “알아서 쉬라”며 휴가를 보내고 간부들만 2, 3일에 한 번씩 출근하고 있다.
한국산업단지공단 부산지사 관계자는 “녹산산단에서도 자동차 기계 관련 중견업체가 곧 화의를 신청할 것이란 소문이 나도는 등 분위기가 좋지 않다”면서 “기업들이 일시적인 자금난 때문에 도산하지 않도록 대출을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울산=정재락 기자 raks@donga.com
부산=조용휘 기자 silent@donga.com
수원=남경현 기자 bibulus@donga.com
▼지방공단 살릴 대책 시급▼
“현금 없으면 부품공급 안하는 상황
담보율 낮춰 대출받기 쉽게 해줘야”
지방 공단의 위기와 관련해 지역경제 전문가들은 연쇄 도산을 막기 위해 정부가 시급히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우선 전국적으로 막연하게 퍼져 있는 시장불안 심리를 하루빨리 잠재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인천상공회의소 민태운 경제정책팀장은 “광범위하게 확산된 불안심리 때문에 수출 중소기업이 부품을 공급받고 싶어도 현금이 없으면 부품을 내주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정부가 금융권에다 기업에 돈을 풀라고만 종용할 게 아니라 담보율을 낮추게 하는 등 제도적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우량 기업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정해 은행에 대출금 상환을 연장해 주거나 신규 자금을 지원하도록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설명이다.
울산시 김상채 투자지원단장은 “지난해 담보만 있으면 중소기업진흥공단의 보증서를 내지 않아도 대출해 줬지만 올해에는 이를 제출해도 대출받기 어렵다는 중소기업이 많다”며 “은행의 대출기피 현상이 계속될 경우 흑자를 내고도 도산하는 기업이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고용 불안을 막기 위한 대책을 세울 것도 주문하고 있다.
윤영현 광주전남경영자총협회 사무국장은 “현재 10조 원 정도 비축된 고용보험기금을 풀어 고용 불안을 해소하고, 기업체의 4대 보험 부담률을 일정기간 낮춰주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고통 분담을 위해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다행스럽게도 지역 기업의 고통을 나누기 위해 시민과 자치단체가 나서고 있다. 실업극복국민운동인천본부 등 인천지역 21개 시민사회단체는 18일부터 ‘GM대우차 사주기 범시민운동’을 시작했다. GM대우가 자동차 주문량이 감소하면서 다음 달 20일부터 열흘 동안 부평공장의 생산라인 가동을 중단하기로 결정한 데 따른 것.
이들은 “GM대우와 대우차판매의 협력업체를 포함한 근로자가 4만 명에 이르는 등 인천지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5%에 이르는 대표 기업인 만큼 위기를 극복하는 데 동참하겠다”고 밝혔다.
인천=황금천 기자 kchwang@donga.com
광주=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대전=이기진 기자 doyoc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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