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對日) 수출업체들은 엔고로 가격경쟁력이 높아져 도약의 기회를 맞은 반면에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과 한국에 진출한 일본 기업들은 “엔고로 벼락 맞았다”며 울상이다.
일본과 거래하는 농산물 수출업체는 ‘엔고 특수’의 대표 사례. 멜라민 분유 파동으로 중국산 식품에 대한 일본인들의 불신이 커지면서 한국 농산물이 반사 효과를 누리고 있는 가운데 가격경쟁력까지 갖추게 됐기 때문이다. 농수산물유통공사에 따르면 지난달 대일 농산물 수출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23% 증가했다.
전북 김제시에서 파프리카를 재배하는 농산무역은 유기농법으로 키운 웰빙 이미지에 저렴한 가격을 앞세워 일본 시장을 공략한 결과, 지난달 수출액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15% 증가했다.
일본에 화훼류를 수출하는 경남 김해시 대동농협도 장미 주문이 폭주해 물량을 대느라 애를 먹고 있다.
‘엔고’ 덕분에 막걸리 수출도 호황이다. 경기 포천시에 위치한 막걸리 생산업체 이동주조는 올해(2007년 11월∼2008년 10월) 일본 수출액이 290만 달러로 지난해보다 30% 늘었다. 원-엔 환율 급등이 본격화된 10월 판매량은 상반기보다 20%가량 늘었고 엔화 수입을 원화로 환산하면 매출액은 40%나 증가했다.
최희경 대표는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막걸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다 최근 주춤했는데 ‘엔고’로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며 즐거워했다.
대일수출 제조업체들도 ‘엔고’를 수출 확대 기회로 보고 있다.
접착테이프를 생산하는 대전의 중견기업 W사는 지난 10년간 ‘엔저’에 따른 가격경쟁력 부담으로 일본 수출을 중단했다 최근 엔고 국면을 기점으로 대일 수출을 재개했다. 지난달 일본 오사카(大阪) ‘한국상품전시상담회’에서 380만 달러 규모의 수출계약을 예약하는 성과를 올렸다.
안모(47) 대표는 “일본 자재를 쓰지 않아 수입 원가가 올라가는 일 없이 순수하게 수출액만 증가할 것”이라며 “세계적 불황으로 미주, 동남아 수출물량이 30% 정도 줄었지만 그 빈자리를 일본 시장에서 메울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유학생이나 일본 주재 회사원들은 ‘엔고의 그림자’를 실감하고 있다.
대기업에서 연봉 5000만 원을 받던 5년차 직장인 이모(34) 씨는 ‘게임음악 작곡가’라는 어릴 적 꿈을 이루기 위해 3월 사표를 냈다. 컴퓨터 게임의 본고장인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씨가 꿈꾼 ‘제2의 인생’은 엔화 가치 급등으로 산산조각 날 위기에 처했다. 3000만 원을 손에 쥐고 유학길에 올랐지만 엔화가 두 배 가까이 오른 탓에 고액의 수업료와 생활비를 감당하느라 모아놓은 돈을 거의 써버렸기 때문. 이 씨는 “돈을 빌리지 못하면 1년간 학업을 멈추고 식당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부터 벌 계획”이라고 말했다.
라멘, J팝 등 문화 아이템을 가지고 한국에 진출한 일본인들도 ‘엔고’로 수입원가가 올라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서울 홍익대 부근에서 일본식 라멘을 판매하는 ‘나고미 라멘’은 지난달 매상이 20%가량 줄었다. 면과 야채 등 라멘 재료 대부분을 일본에서 들여오다 보니 생산원가가 올랐지만 학생 손님이 대부분이라 가격은 올릴 수 없기 때문.
중고 일본 음반과 일본 도서를 수입해 판매하는 서울역 ‘북오프’의 경우 ‘엔고’ 현상으로 인한 채산성 악화를 감당할 수 없어 수입 물량을 줄였다. 가격은 종전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엔고’에 따른 가격 인상을 우려해 손님들의 발길도 뜸해지는 추세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