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건전성 악화-기업 불확실성에 돈 안돌아
달러화 부족도 여전… “유동성 공급 더 빨라야”
정부와 한국은행이 9월 15일 미국 투자은행(IB)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 이후 133조 원의 자금 투입 계획을 밝혔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금융시장의 ‘돈 가뭄’은 여전하다.
금융당국이 댐의 수문(水門)을 열었지만 1차 관문인 은행들이 자산건전성이 악화돼 물을 기업으로 흘려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의 부도리스크 증가도 은행이 기업대출을 꺼리는 원인이다.
가계부문 역시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큰 폭으로 떨어지지 않아 혜택을 충분히 못 누리고 있다.
○ 당국, 돈은 풀었는데…
20일 정부와 한은에 따르면 ‘리먼 사태’ 이후 정부 당국과 한은이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투입했거나 예정하고 있는 달러와 원화 자금은 모두 133조 원에 이른다.
당국은 국내 금융기관과 기업의 달러 자금난 해소를 위해 300억 달러를 공급했고 추가로 250억 달러를 더 풀어 모두 550억 달러를 투입할 예정이다. 국내 은행의 외화 차입에 대한 140억 달러 규모의 지급보증까지 합하면 ‘달러 가뭄’ 해갈을 위해서만 690억 달러(약 85조 원·9∼10월 평균 환율 1231.7원 기준)가 공급될 것으로 보인다.
한은의 단기 유동성 공급과 정부 당국의 10조 원 규모의 채권시장안정펀드 조성 등을 통해 원화 자금시장에도 47조9000억 원을 쏟아 붓기로 했다. 한은은 지난달 9일부터 3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도 1.25%포인트 인하했다.
한은이 돈줄을 풀자 시중 금리의 기준이 되는 3개월 만기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와 3개월 은행채 금리는 이달 들어 19일까지 각각 0.48%포인트, 0.81%포인트 떨어졌다. 하지만 한은의 기준금리 하락폭(1.25%포인트)에는 크게 못 미치는 낙폭이다. 3개월 만기 회사채 금리는 8.68%로 10월보다 오히려 올랐다.
달러 자금 사정도 ‘리먼 사태’ 직후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수출환어음 매입이나 수입유전스(기한부어음) 등 기업들이 느끼는 무역 금융의 어려움은 여전하다.
은행권의 하루짜리 달러 차입 금리는 이달 초 연 0.30%에서 최근 0.45%로 올랐고 중장기 차입은 여전히 어렵다. 한 외국계 은행 국내지점 관계자는 “미국 자동차산업 구제금융 논란과 실물경제 침체로 국제 금융시장의 불안감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며 “본점에서 달러를 빌리기가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 돈이 흐르지 않는 까닭은
국제 금융시장의 신용경색이 여전하고 정부 당국이 밝힌 유동성 공급에 시일이 걸려 돈이 흘러가야 할 길목이 곳곳에서 막혀 있다.
김상로 산은경제연구소장은 “현재 통화유통 속도와 유동성을 볼 때 정부 당국과 한은이 조금 더 속도를 내 유동성을 공급하고 규모도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부동산 등 실물시장 침체와 건설업 등의 기업 구조조정도 시장의 불확실성을 키워 자금 회전을 막고 있다. 올해 9월 말 현재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10%대로 떨어진 은행이 자산 건전성 악화를 우려해 대출에 소극적인 것도 ‘돈맥 경화’의 원인이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금융당국이 BIS 비율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끌어올릴 것을 요구해 은행들이 대출에 대해 더 보수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시중 금리를 더 내려 자금 수요를 줄이고 은행권에서 돈을 구하지 못하는 중소기업이 채권시장에서 자금을 직접 조달할 수 있는 ‘우회 통로’를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정부 당국이 추진하는 10조 원 규모의 채권시장안정펀드의 추진 방안을 서둘러 내놓고 프라이머리 채권담보부증권(CBO) 등의 매입에 나서 중소기업의 자금줄을 풀어줘야 한다는 것.
한편 한은은 이날 채권시장안정펀드에 대한 지원 규모를 24일로 예정된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