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노동강도 따질 한가한 상황 아니다’ 위기감
고용안정 최우선 역점… 사측선 생산성 향상 기대
현대차 노조 전환배치 갈등… 기존방침 변화없어
기아자동차 노사가 ‘물량 재배치’와 ‘혼류(混流) 생산’ 등 생산체제 유연화에 원칙적으로 합의한 것은 이번 글로벌 경제위기의 심각성을 절감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특히 ‘강성(强性) 노조’로 꼽히던 기아차 노조가 이 같은 합의를 한 것은 전반적인 노사 관계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최근 세계 자동차시장의 현실은 냉엄하다. GM, 포드, 크라이슬러 등 미국 ‘빅3’ 자동차 업체들은 파산 위기에까지 직면해 있고 일본 도요타자동차마저 감산(減産)과 감원(減員)에 나서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생산체제 유연성을 갖추지 못하면 세계시장에서의 도태와 종업원의 고용 불안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이 기아차 노조를 변화시켰다.
○ ‘강성 노조’를 움직인 감원 불안
기아차 노조는 그동안 유연한 생산체제 구축에 강력히 반대했다. 물량 재배치나 혼류 생산을 하면 업무 강도가 높아지고, 공장별로 결속력을 다지는 자동차 회사 노조의 특성이 약화돼 노사 협상 때 회사 측을 압박할 카드가 줄어든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최근 자동차 판매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기아차는 올해 들어 수출과 내수를 합친 전체 판매량(95만7023대)이 작년 같은 기간보다 5.6% 줄었다.
이에 따라 회사는 수요가 급감한 레저용 차량(RV) 생산라인을 중심으로 감산에 들어갔고, 근로자들 사이에서는 조만간 감원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노조로서는 고용 안정성이 흔들리는 위기 상황에서 노동 강도 같은 ‘한가한 이유’를 내세우며 계속 회사 측의 제안을 거부할 경우 조합원들의 이탈 가능성이 높아지는 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기아차는 과거 경영난에 따른 부도라는 아픈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근로자들의 ‘고용 안정’에 대한 열망이 강하다.
기아차 노사가 앞으로 넘어야 할 산도 적지 않다. 일감이 줄어든 근로자들은 물량 재배치나 혼류 생산을 환영하고 있다. 반면 주문이 밀리는 소형차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은 다른 공장 근로자에게 일감을 나눠주면 당장 월급이 줄어들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부정적이다. 노조원들 간에 이해가 다른 셈이다.
하지만 일단 생산 유연화라는 첫발을 내디뎠기 때문에 기아차의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회사 측은 기대하고 있다.
○ 다른 회사로도 확산될까?
기아차 노조가 생산 유연화에 원칙적으로 합의함에 따라 같은 현대·기아자동차그룹 계열인 현대차 노조도 이를 거부할 명분이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현대차 노조는 물량 재배치와 혼류 생산 등 생산 유연화에 대해 “노조원들의 의견을 따르겠다”고만 할 뿐 기존 방침을 바꿀 구체적인 움직임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최근 현대차 울산5공장에서 전환배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미묘한 갈등은 사안의 복잡함을 보여주고 있다. 울산공장 2공장에서 생산되던 대형 승용차 ‘에쿠스’의 생산 중단으로 일감이 없어진 200여 명 중 20여 명이 울산5공장(제네시스, 투싼 생산)으로 옮겨 일하게 되자 5공장 조합원들이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사정이 더 어려워지면 달라질 가능성도 있다. 현대차 노조는 2일 울산에서 열린 경영설명회에 참석한 뒤 “지금이 외환위기 이후 최대 위기라고 인식하고 있다”며 “고용이 안정된다면 회사의 비상경영체제에 적극 협력할 생각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GM대우차는 공장 가동을 중단할 정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만큼 고용 안정만 보장된다면 노조가 생산 유연화에 쉽게 동의할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것으로 관측된다.
쌍용자동차도 최근 노사가 전환배치에 합의한 만큼 공장 가동률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르노삼성자동차는 2000년 9월 출범 당시부터 부산공장에서 혼류 생산을 하고 있다.
송진흡 기자 jinhup@donga.com
황진영 기자 bud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