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총재 “비상조치 하더라도 장기債 인수는 부담 따른다”
한국은행이 앞으로 선택할 추가 조치는 기업어음(CP)을 한은이 사들여 기업에 돈을 직접 공급하는 방안이 유력하다. ‘최종 대부자’ 역할을 맡고 있는 중앙은행이 ‘최초 대부자’ 역할까지 자임하고 나서는 것이다. 그만큼 상황이 급박하다는 의미다.
한은은 10월 9일 이후 지난달까지 세 번에 걸쳐 금리를 1.25%포인트 내렸다. 하지만 시장금리는 국고채 금리만 큰 폭 떨어질 뿐 회사채와 CP 금리는 오히려 올랐다.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10월 9일 연 5.33%에서 이달 10일 4.21%로 1.12%포인트 떨어졌다. 반면 3년 만기 회사채(AA-)와 3개월물 CP 금리는 같은 기간 각각 1.11%포인트, 0.48%포인트 상승했다.
이런 현상은 시중은행들이 자기자본 확충을 위해 금고를 열지 않고 있고, 기업의 부도 위험도 커져 회사채와 CP를 사줄 주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은이 돈을 풀어도 실물시장으로 ‘온기’가 퍼지기 어렵다. 상황이 계속 악화되면 아무리 금리를 낮춰도 돈은 돌지 않는 ‘유동성 함정’까지 올 수 있다.
이 때문에 돈이 필요한 곳에 한은이 직접 ‘파이프’를 박고 돈을 공급할 필요성이 거론된다. 한은은 이날 환매조건부채권매매(RP) 대상 증권사를 2곳에서 12곳으로 늘려 은행권 이외의 자금공급 통로를 확대했다.
한은법 80조는 비상 상황에 금융통화위원 4명 이상이 찬성하면 금융기관이 아닌 영리기업에 대해서도 자금을 공급할 수 있는 근거를 명시하고 있다. 다만, 단서로 ‘금융기관이 기존 대출금을 회수하며 신규 대출을 억제하고 있는 심각한 통화신용의 수축기’로 한정했다.
이성태 한은 총재는 이날 “심각한 통화신용의 수축기이기 때문에 비상수단을 사용해야 하는지를 판단해야 할 경계선에 와 있다”고 말했다. CP직접 매입의 명분을 축적하는 발언으로 풀이된다.
금융권에서는 한은의 역할이 단기 유동성 공급인 만큼 한은이 1년 이상 장기물인 회사채보다는 단기물인 CP를 사줘 단기 유동성을 공급하는 방안에 나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비상조치를 하더라도 모든 것을 다해 줄 수는 없고 장기물 인수에는 부담이 따른다”는 이 총재의 발언도 같은 결이다.
앞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도 10월 7일 CP 매입 계획을 밝힌 후 2573억 달러 상당의 CP를 매입했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