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퇴직’이 ‘희망퇴직’으로, 단기서 장기로

  • 입력 2008년 12월 14일 18시 23분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실물경제 침체로 이어지면서 국내에서도 금융권을 시작으로 인원감축을 위해 희망퇴직을 실시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10년 전 외환위기 때도 국내 기업들은 대규모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그러나 최근의 희망퇴직 풍경은 10년 전과 사뭇 다르다. 외환위기 때는 여러 기업들이 동시에 줄줄이 무너지면서 빠른 시일에 대규모 인원감축이 이뤄졌지만 최근엔 과거보다 천천히 진행되는 분위기다.

●천천히 진행되는 희망퇴직

조기퇴직을 뜻하는 용어로 과거엔 명예퇴직이 널리 쓰였지만 정리해고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등 부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 요즘엔 보다 긍정적 의미를 부여한 희망퇴직이란 용어가 널리 쓰인다. 기업에 따라 희망퇴직, 명예퇴직, 조기퇴직, 특별퇴직, 선택정년제 등의 용어로 다양하게 쓰이는데 같은 의미다.

최근의 희망퇴직은 바뀐 용어답게 최대한 근로자의 선택을 배려해주는 분위기가 우세하다. 물론 일부 기업에서는 퇴직후보군 명단을 정해놓고, 권고 퇴직을 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예전보다 많은 퇴직위로금을 지급하는 등의 방법으로 자발적인 희망퇴직 신청률을 높이는 기업들이 더 많다.

올해 193명을 희망퇴직시킨 SC제일은행 관계자는 "원하지도 않는 사람을 일방적으로 자르는 분위기는 거의 없다"며 "유학, 사업 등 하고 싶은 일을 정한 뒤 신청한 직원이 상당수"라고 말했다.

10년 전 외환위기 당시엔 워낙 단기적 충격이 커 기업들이 당장 인원을 감축하지 않으면 부도 위기에 몰리는 상황이었다. 기업들은 1~2년 사이 집중적으로 많은 인원을 감원했다. 일반은행 직원 수는 1997년 말 11만3493명에서 1998년 말 7만5332명으로 1년 사이에 33.6%나 줄어들었다.

짧은 시간 내 인력을 집중적으로 감축하다보니 인력감축으로 인한 업무공백이 생긴 것이 후유증으로 지적됐다. 이후 노사가 협의해 신청자를 받아 퇴직시키는 희망퇴직제도를 매년 실시하는 기업들이 늘어나 과거와 같은 집중적, 대규모 인원감축보다는 수시로 소규모 인원감축을 통해 충격을 최소화하고 있다.

조우현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는 "10년 전 외환위기와 달리 지금의 금융위기는 장기화되는 추세"라며 "짧은 시간 내에 대거 나가는 감원이 아니라 여러 해에 걸쳐, 최소 3년 간 기업들이 천천히 희망퇴직을 실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 현대·기아차, LG, SK 등 국내 주요 대기업들도 인위적 구조조정은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퇴직조건은 좋아졌지만 신청 꺼려

기업들은 희망퇴직 신청률을 높이기 위해 과거보다 신청 대상을 넓히고, 퇴직위로금 조건을 좋게 내걸고 있다.

하나대투증권은 1998년 명예퇴직 당시엔 월평균 급여 6개월치에 보조금 800만 원을 줬지만 올해는 월평균 급여 18개월치에 근속기간에 따라 6~20개월까지 가산해줬다. SC제일은행도 1998년 제일은행 명예퇴직 당시엔 월평균 급여 9개월치에 해당하는 위로금을 줬지만 이번엔 최고 34개월까지 지급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때 조기퇴직 후 자영업으로 뛰어든 동료들이 성공하지 못하고 줄줄이 실패하는 모습을 본 가까이에서 지켜본 경험이 있는 40대 이상 직장인들은 희망퇴직에 선뜻 응하지 않고 있다. 실제 회사에서 퇴직을 원하는 40대 이상 책임자급보다는 30대 사원들이 유학이나 이직을 위해 희망퇴직을 신청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노동연구원 방하남 연구위원은 "외환위기 때 자영업으로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희박하다는 점을 이미 선행학습을 통해 알고 있는 직장인들이 많다"며 "이번 경제위기가 단기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최소 몇 년간 이어진다는 인식이 퍼져있는 만큼 다른 일을 찾아보려는 사람보다 회사에 남아있기를 원하는 직장인들이 많다"고 말했다.

신수정기자 crystal@donga.com

이서현기자 baltika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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