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이 돈 가뭄에 시달리는 '빈혈'(유동성 부족) 증상이 어느 정도 해소됐지만 그 돈이 기업으로 가지 않아 '돈맥경화'(신용 경색) 현상은 여전한 것.
그럼에도 당국의 처방은 여전히 빈혈 처방인 수혈(유동성 공급) 쪽에 무게가 쏠려 있다. 11일 한은이 기준금리를 1%포인트 낮춘 것도 한 예다. 혈관 벽에 붙은 콜레스테롤을 걷어내고, 필요하면 대체혈관을 끼워야 하는데 계속 수혈만 하고 있는 꼴이다.
사실은 한은도 '안이하고 굼뜨다'는 정부의 압박에 떠밀려 억지로 인하하는 표정이다.
● 공급된 자금 상당액 한은으로 역류
15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한은이 '리먼 사태' 이후 시중에 공급한 원화 자금은 모두 20조1000억 원으로 집계됐다. 한은이 은행이 맡긴 예금지급준비금에 5000억 원의 이자를 준 것까지 포함하면 원화 자금 20조6000억 원이 시중에 풀린 것이다.
곳간에서 돈이 풀렸지만 기업 현장에서는 '온기'를 느낄 수 없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부대책이 도움이 안 되는 이유에 대한 대한상의 조사에서도 기업들의 35%가 '은행 창구의 소극적 태도'를 꼽았으며 '정책자금 액수가 적어서'는 4%에 불과했다.
풀린 돈이 기업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한은이나 국고로 '역류'하는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한은이 환매조건부채권(RP) 매각을 통해 은행권으로부터 흡수한 초과유동성 규모가 평잔 기준으로 9월 7조 원에서 11월 11조5000억 원으로 크게 늘어난 것이 그 증표다. 12월에도 은행권이 RP 매입 신청을 한 규모가 10조4000억 원에 이른다.
한은은 이 가운데 5조 원어치의 채권을 팔았다. 중앙은행에 돈을 맡겨 기준금리 정도의 안정적인 수익만 내지 말고 "기업으로 돈을 돌리라"는 '경고'다.
● 신용위험 해소가 열쇠
돈이 기업으로 흐르게 해야겠지만 그렇다고 한은이 기업어음(CP)을 매입해 직접 '파이프'를 꽂는다면 이는 '상징적 조치'일 뿐이다. 한은이 직접 신용도를 평가할 수 있는 기업은 많지 않기 때문. 모세혈관처럼 촘촘히 퍼져 있고, 거래 기업의 현실을 가장 잘 아는 시중은행이 손발이 돼 움직이게 해야 한다.
이동걸 금융연구원장은 "은행 창구에서 돈이 풀리도록 하기 위해서는 신용보증기금, 기술보증기금의 기능을 확대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권했다. 그래서 은행이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 부담을 덜고 대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기금 자본을 10조 원 확충하면 100조 원이 풀린다.
정부와 국회는 신보와 기보에 각각 9000억 원, 2000억 원 등 1조1000억 원의 출자금을 확대해 보증여력을 10조1000억 원까지 늘리기로 했다. 이에 대해 이 원장은 "늘린 것은 반갑지만 이것으로는 턱도 없다. 보증여력을 적어도 50조~100조 원 규모로 확충해야 과감하고 선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안택수 신보 이사장도 "추가 출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인석 중앙대 교수는 "실물경제 침체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자금을 투입할 수 있는 공적자금을 선제적으로 조성하고 증세에 맞춰 신속하게 자금을 집행하는 방안도 당국이 내놔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은행의 자본 확충 △기업 구조조정 등에 중점을 둬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허승호기자 tigera@donga.com
박용기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