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업 선방했는데 장부상으론 손실” 연말결산 기업들 속앓이

  • 입력 2008년 12월 16일 02시 59분


보유 자산 가치 ↓… 비축 원자재 값 ↓… 원화표시 부채 ↑

주가 - 부동산 급락…대출 담보능력 떨어져 조기상환 압박 받아

원자재 급락 직격탄…화학업계, 비쌀때 산 재고 애물단지 전락

고환율 피해 눈덩이…항공-해운업계는 일해서 번 돈 다 까먹어

《코스닥에 등록한 정보기술(IT)업체 A사는 최근 주거래 금융기관으로부터 갑자기 “빌려간 30억 원 중 10억 원을 먼저 갚든지 추가로 담보를 설정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담보로 잡혀 있던 사옥(社屋)의 시세가 대출 받을 때(70억 원)보다 10억 원가량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 회사 K 사장은 “추가로 잡힐 만한 건물도 없는 데다 당장 10억 원을 마련할 길도 없어 통사정을 해 일단 4억 원 정도만 먼저 갚는 것으로 타협했다”고 털어놓았다. 주가와 부동산 등 자산가격 하락 및 이에 따른 담보가격 급락, 원화 환율 상승(원화가치 하락), 급등했던 국제 원자재값의 급락에 따른 후유증으로 고민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올해 결산작업이 본격화하면서 글로벌 악재 속에서도 비교적 영업에서 ‘선방(善防)’했지만 각종 ‘장부상 손실’이 커져 적자 기업으로 전락한 회사도 적지 않다.》

○ 자산가치와 담보가격의 동반하락

15일 한국증권선물거래소에 따르면 이날 종가 기준 현대중공업의 시가총액은 16조7200억 원으로 지난해 말(33조6300억 원)보다 16조9100억 원이나 감소했다. 포스코(―16조860억 원) 삼성전자(―12조3731억 원) 우리금융지주(―9조4223억 원) SK에너지(―9조2431억 원) 하이닉스반도체(―8조9801억 원) 등도 시가총액 손실액이 컸다. ▶표 참조

자산 가치의 하락은 최근의 금융 경색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자사주(自社株)를 담보로 잡혀 대출을 받은 기업은 주가가 폭락하면 금융기관 처지에서는 담보 잡은 주식을 헐값에 매각하는 게 손실을 최소화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럴 경우 해당 회사는 지분 감소로 경영권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부산의 자동차부품업체인 B사는 최근 유동 자산을 마련하기 위해 공장 용지 중 절반을 시장에 내놓았다. 그러나 같은 지역의 비슷한 회사 100여 개가 같은 이유로 부동산을 내놓다 보니 거래는 형성이 되지 않고 가격만 계속 떨어지고 있다. 자산 가치 하락에 대처하기 위한 자산 매각 시도가 결국 자산 가치만 더 떨어뜨리는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경기지역의 중소 금속부품업체 사장도 1억 원의 평가액으로 설정했던 자신의 아파트값이 최근 8000만 원대까지 떨어지자 거래처로부터 추가로 담보를 설정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자산 가치가 하락하면서 은행의 담보 설정액이 줄어들자 은행들도 추가 담보 설정이나 대출금의 조기 상환을 촉구하고 있다. 더는 담보 설정할 게 없는 회사들은 대출금 마련을 위해 일부 자산을 매각하려 하지만 부동산 가격 하락으로 ‘장부상 손실’만 더 커지고 있다.

○ 원자재 급등락의 후유증

국내 최대 나프타분해시설(NCC) 업체인 여천NCC는 지난달 연산 40만 t 규모의 제3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원료인 나프타 가격이 급등세에서 급락세로 돌아선 데다 제품가격도 동반 하락하면서 재고차손이 크게 늘어 공장을 돌릴수록 손해가 나기 때문이다.

국제 나프타 가격은 7월 t당 평균 1156.8달러에 이르렀지만 지난달 270달러대까지 떨어졌다. 화학업계에서는 나프타의 t당 재고차손이 700∼800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토탈의 한 임원은 “나프타 가격이 구입할 때보다 계속 떨어지고 있어 장부상 손실이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LG화학 측도 “원자재값의 급락으로 재고 자산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평가손이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기업은 경영상 악재를 우려해 구체적인 ‘장부상 손실’ 규모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은 “기업들이 장부상 손실이 발생하면 기업 경영이 힘들어지고 대외적으로 부실기업으로 비치게 된다”며 “이대로 놔뒀다가는 올해 결산 때 한국 기업들의 신용도는 모두 재평가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고환율 여파도 가세

환율 상승에 따른 대표적 ‘장부상 적자’ 업종은 해운 및 항공업이다. 이들 업종은 해외에서 비행기 선박 등을 발주할 때 해외채무를 일으키는데 최근 원화가치의 폭락 때문에 원화로 표시되는 부채 비용이 크게 늘었다.

현대상선은 1∼9월 매출액 5조6980억 원, 영업이익 5477억 원으로 사상 최대의 실적을 기록했지만 환차손 같은 ‘영업외 비용’이 너무 커서 순이익은 1065억 원 적자였다고 밝혔다. 이 회사의 한 임원은 “선박 발주를 위해 조달한 달러 자금을 장부상에는 원화로 기록한다”며 “부채 상환기간은 보통 5∼10년 걸리는데도 요즘처럼 달러 가치가 급등하면 재무제표상 적자가 심한 것처럼 비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진해운도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2850억 원이나 됐지만 비슷한 이유로 2370억 원의 당기 순손실이 났다.

아시아나항공도 같은 기간 403억 원의 영업이익을 냈으나 유가 상승 및 환차손 때문에 순이익은 오히려 637억 원의 손해를 봤다. 대한항공은 같은 기간 외화채무 평가손실 등 때문에 영업적자(―1219억 원)의 10.7배인 1조2984억 원의 순손실을 냈다.



::영업이익::

기업 매출액에서 생산 활동에 사용된 비용을 뺀 이익금으로 기업의 기초적인 영업 활동을 평가하는 지표로 쓰인다.

::당기순이익::

한 기업의 영업이익에서 대출금 이자나 주식 매매 손익, 법인세 등을 빼고 순수하게 남은 이익이다.

::영업외 비용::

회사의 정상적인 영업활동 외에 사용된 기업 비용을 의미하며 환율변동에 의한 환차손도 여기에 포함된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조용우 기자 woogija@donga.com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장부상 손실 고통 중견-중소기업 연말 집중지원”

지경부 종합지원단 “고충 상시 접수해 신속 해결”

전례를 찾기 어려운 글로벌 경기 동반 한파(寒波)로 중소기업의 유동성 압박이 심해지면서 정부 당국도 비상이 걸렸다.

상당수 중견·중소기업들이 대기업에 부품을 납품하고 있어 이들 기업의 부실이 자칫 실물경제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적지 않은 기업이 영업이익을 내고도 자산가치 하락과 환율 급등 등 영업 외적인 이유로 ‘장부상 손실’을 보는 것으로 정부 당국도 파악하고 있다.

지식경제부가 1일 기존의 업종별·기능별 위기대응반과 기업도우미센터를 통합한 뒤 기능을 확대한 실물경제 종합지원단(단장 임채민 지경부 1차관)에도 이 같은 고통을 호소하는 기업의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15일 종합지원단에 따르면 1일부터 자동차와 조선, 전자 등 주력산업 부품을 생산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1차 현장 일제점검을 벌인 결과 이날 현재까지 모두 80여 건의 애로사항이 접수됐다.

종합지원단은 접수 속도를 감안할 때 이번 1차 현장 점검이 끝나는 19일까지는 모두 120여 건이 접수될 것으로 보고 있다.

종합지원단 측은 “애로사항의 70%는 자금경색으로 고통을 받거나 환율 급등으로 재무제표가 급격히 나빠지는 사례”라며 “연말연초에 이들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해결해 늦어도 1월 초순까지는 상황이 나빠지는 것을 막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종합지원단이 출범하기 전인 기업도우미센터 시절에는 재무제표 악화 등 금융 문제로 애로를 겪고 있다는 기업의 비율은 10∼20%였는데 최근 급속히 늘어나는 추세다.

지경부 당국자는 “현장 점검에서 접수된 애로사항 외에도 기업의 고충에 대해 상시 접수하고 있다”며 “어떤 종류의 고충이라도 종합지원단(1577-0900)으로 연락을 주면 가능한 한 빨리 해결책을 제시하고 다른 부처의 민원 사안이라도 종합지원단이 대신해서 협의를 해 줄 계획”이라고 말했다.

차지완 기자 ch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