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서북쪽으로 1시간 반 정도 승용차를 몰고 가면 효고(兵庫) 현 가토(加東) 시 사호(佐保)가 나온다. 논밭이 많은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드문드문 있는 건물 가운데 ‘Panasonic(파나소닉·옛 마쓰시타전기)’이라고 적힌 파란색 영문자는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이 건물은 파나소닉이 자랑하는 리사이클 공장(PETEC)이다.》
2001년 ‘가전 리사이클법’ 시행… 소비자-기업-정부 협업
철-플라스틱 재생 넘어 희귀금속 채취… ‘자원부국 日’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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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PETEC를 방문했을 때 두 가지 점이 의아했다.
먼저 폐가전제품을 부숴 원료를 만드는 공장이어서 시끄러운 파쇄(破碎)음이 들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가을철 풀벌레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했다. 모든 공정을 건물 내부에서 처리하기 때문이었다.
공장 작업장 벽면에는 ‘TREASURE HUNTING(보물 사냥)’이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여럿 붙어 있었다. ‘웬 보물?’
고개를 갸웃하는 기자에게 도미타 가즈유키(冨田和之) 사장은 “폐가전에서 보물을 찾는다는 느낌으로 질 높은 재활용 원료를 만들자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 꽉 짜인 리사이클 과정
PETEC는 2000년 4월에 설립돼 지금까지 522만 대의 폐가전제품을 리사이클했다. PETEC 같은 리사이클 공장은 일본 전역에 48개가 있다.
도미타 사장은 “만약 파나소닉이 수거부터 재생까지 모두 책임져야 한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작업”이라며 “소비자, 기업, 정부가 꽉 짜인 구조 속에 서로 협업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2001년 ‘가전 리사이클법’을 시행했다. 이 법의 핵심은 브라운관 TV, 에어컨, 냉장고, 세탁기 등 4개 품목을 반드시 리사이클하도록 의무화한 것이다. 올해부터는 박막(薄膜)형 액정TV도 리사이클 대상에 포함된다.
소비자와 기업도 서로 역할을 나눠 이를 도왔다. 예를 들면 이렇다.
오사카 스이타(吹田) 시 쓰쿠모다이(津雲臺)에 사는 다나카 슈코(田中修子·여) 씨는 최근 가전매장에서 에어컨을 하나 샀다. 매장 직원은 에어컨을 배달해 설치까지 마친 뒤 다나카 씨의 옛 에어컨을 수거했다. 이때 다나카 씨는 에어컨 리사이클에 필요한 요금으로 2625엔(약 3만8325원)을 지불했다.
리사이클 요금은 가전 리사이클법에 정해져 있는데 가전 품목별로, 크기별로 액수가 다르다.
매장 직원은 수거한 에어컨을 오사카 남부의 신에(新榮)운수까지 배달했다. 신에운수는 일종의 중간 유통센터인데 일본 전역에 380곳이 있다.
○ 폐가전에서 보물 찾기
파나소닉은 4개의 리사이클 공장에 투자했는데 PETEC도 그중 하나다.
공장 내부에선 4개의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갔다. 브라운관 TV, 에어컨, 냉장고, 세탁기 등 가전제품별로 컨베이어 벨트가 달랐다.
우선 사람이 기계적으로 가전을 분리했다. 세탁기 라인은 3명이 1조를 이뤘다. 2명은 세탁기의 외관을 분리했고, 1명은 물기를 제거했다. 이어 조립품들은 자석판 위를 지나가면서 철과 플라스틱으로 나뉘었다. 철 성분은 원심분리기를 거치면서 더 정교하게 분리됐다.
이런 과정을 통해 PETEC는 폐가전 중량의 약 80%를 재생시킨다. TV 브라운관 1개는 유리컵 68개 분량에 해당한다고 한다. 하지만 TV 브라운관은 유해 물질을 포함하고 있어 다시 브라운관으로 재생된다.
PETEC는 또 정기적으로 파나소닉과 미팅을 하며 리사이클하기 쉬운 제품에 대한 의견을 제출한다. 실제 PETEC 측이 “제품을 만들 때 접착제를 사용하는 것보다 볼트와 너트를 사용하면 훨씬 리사이클의 순도를 높일 수 있다”고 말했고 파나소닉 가전 담당자는 이 아이디어를 곧바로 수용해 제품 생산에 반영했다.
도미타 사장은 “리사이클을 통해 원료를 만들면 저렴할 뿐 아니라 이산화탄소 발생량도 줄어든다”며 “자원이 부족한 일본에선 리사이클은 점점 더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 자원 부국(富國) 꿈꾸는 일본
최근 일본은 리사이클 분야에서 또 한 번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폐가전을 파쇄해 철과 플라스틱을 재생하는 수준을 넘어 폐가전에서 희귀금속을 채취하겠다는 목표다. 이름 하여 ‘도시 광산업(urban mining)’을 하겠다는 것.
도미타 사장은 “오디오 비디오 제품을 만들 때 금 인듐 등 희귀금속을 많이 사용하는데 최근 일본에선 희귀금속을 추출하는 기술이 급속히 개발되고 있다”며 “파나소닉 역시 희귀금속 추출을 염두에 두고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파나소닉은 지난해 2월 폐가전제품 중 재활용이 불가능했던 혼합물로부터 금속만 추출하는 기술을 개발해 발표했다.
닛코금속은 최근 100억 엔을 투입해 이바라키(茨城) 현 히타치(日立) 공장에 도시 광산업 전용 설비를 도입했다. 이 설비로 연간 금 500kg, 인듐 6t을 회수할 계획이다.
‘폐가전 회수’는 사업 성공의 관건이다. 특히 휴대전화는 각종 개인정보가 들어 있어 사람들이 회수에 소극적이다. 기업이 회수과정에 대한 부담만 줄일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성과를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김민정 KOTRA 오사카 KBC 과장은 “가전 회수가 힘들긴 하지만 일본은 지속적으로 도시 광산업을 추진하고 있다”며 “도시에서 잠자고 있는 금속과 회수 기술력을 감안하면 일본은 이미 자원 빈국이 아니라 자원 부국”이라고 말했다.
오사카·가토=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휴대전화 1대에 金 0.02g
日전역 220조원어치 ‘매장’
폐가전 많은 한국도
자원해결 대안 부각
일본에서 ‘도시 광산업’이란 단어는 1980년대부터 등장했다. 그동안 금속가격이 낮아 주목받지 못했지만 지난해 상반기(1∼6월)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면서 재조명받고 있다. 일본 가전 및 비철금속 기업들도 최근 도시 광산업 관련 신기술을 속속 내놓고 있다.
도시 광산업의 부가가치는 얼마나 될까.
포스코경영연구소에 따르면 휴대전화 한 대에는 금 0.02g을 포함해 은(0.14g) 구리(14g) 니켈(0.27g) 텅스텐(0.39g) 팔라듐(0.005g)이 들어 있다. 극소량이다. 하지만 휴대전화 수십만 개를 모은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일본 물질재료연구기구가 지난해 1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일본의 도시 광산 규모는 세계 최대다. 예를 들어 일본 도시 광산의 금 축적량은 약 6800t인데 이는 전 세계 금 매장량의 16%에 이르는 규모다. 돈으로 환산하면 약 220조 원이다. 도시 광산업을 통해 일본에서 채취할 수 있는 은은 약 6만 t으로 세계 매장량의 22%, 액정표시장치(LCD) TV나 태양전지에 사용되는 희소금속인 인듐은 약 1700t으로 세계 매장량의 61%로 추산된다. 김유정 한국지질자원연구원 광물자원경제연구실 팀장은 “일본은 제련산업이 발달했고 제조업 기술 수준도 높기 때문에 일찍부터 도시 광산업에 관심이 많았다”며 “현재 일본을 제외하고 도시 광산업에 적극적인 국가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한국 역시 자원 빈국이고 버려지는 폐가전제품이 많기 때문에 도시 광산업의 잠재적인 역량은 크다. 2007년 한국에서 폐기된 휴대전화는 약 1000만 대, 폐가전제품은 860만 대 정도다. 장원익 포스코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도시 광산업은 한국의 자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라며 “경제성뿐 아니라 환경오염을 막는다는 차원에서도 의미가 크다”고 강조했다.
오사카·가토=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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