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은 살아있다]<3>신자유주의, 진화냐 도태냐

  • 입력 2009년 1월 13일 02시 55분


국가 vs 시장… 경제위기 ‘진화’하며 자본주의도 ‘진화’한다

《“‘보이지 않는 손’은 죽었다. 규제여 영원하라.” “‘보이지 않는 손’은 여전히 살아 있다.” 미국발(發) 세계 금융위기의 장기화 가능성이 대두되면서 유럽까지 적극적인 구제금융안을 마련하기 시작한 지난해 9월 말.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을 둘러싸고 미국의 두 학자가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이색 논쟁을 벌였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볼 때 어떤 대처가 올바른가’를 따지는 논쟁이었다.》

애덤 스미스→케인스→신자유주의… 다시 케인스의 등장?

“통화-부동산 등 정부개입 과도” 신자유주의 보완론도 고개

자본주의 위기 때마다 힘겨루기… 경제시스템 ‘변이’ 주목

○ 같은 진화론, 다른 해석

진화생물학자인 데이비드 윌슨 미국 빙엄턴대 교수는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애덤 스미스로부터 유래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은유는 이제 죽었다고 선언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최근 경제위기로 ‘시장’과 ‘자율’을 내세우는 신자유주의에서 적지 않은 문제가 노출됐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협력과 기만, 두 가지 본능을 모두 갖췄다”며 “사람들을 내버려두면 기만하는 자들이 나올 것이며 그 결과로 자발적 협력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만하는 자를 처벌하고, 협력하는 자에게는 보상을 주는 규제가 있어야 협력의 수준이 높아질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국가 개입’과 ‘규제’를 강조한 케인스주의를 두둔한 것이다.

정치철학자 래리 안허트 노던일리노이대 교수는 반박 글에서 “다윈의 아이디어는 사유재산과 자유시장, 제한된 정부 같은 논리를 지지한다”며 “구제 금융은 경솔한 행동에 보상을 해주는 것으로 경제위기를 더 악화시킬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손’이란 아이디어는 ‘의도하지 않은 질서’에 따라 생긴 것으로 ‘인간의 모든 제도는 의도하지 않은 질서에 따라 스스로 생기고 변화한다’는 다윈주의적 생각과 통한다”고 말했다.

두 학자의 논쟁은 글로벌 경제위기로 힘을 잃은 신자유주의가 새로운 형태로 ‘진화’할 것인지, 아니면 케인스주의에 주도권을 내주고 ‘도태’할 것인지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사례다.

○ ‘시장’ 대 ‘국가’…자본주의의 진화

전문가들은 최근 “케인스와 하이에크의 싸움이 다시 시작됐다”고 입을 모은다. 영국의 경제학자 존 케인스가 강조한 ‘국가’와, 오스트리아 출신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중시하는 ‘시장’ 사이의 힘겨루기가 시작됐다는 얘기다.

자본주의는 여러 차례 위기를 겪는 동안 ‘시장’과 ‘국가’ 사이로 무게 중심을 옮겨가며 변화해 왔다. 1930년대 대공황이 발생하자 국가의 개입과 규제를 주장하는 케인스주의가 해결사로 등장하면서, 애덤 스미스 이래 보이지 않는 손의 힘에 기대어온 고전파 경제학의 주도권이 흔들렸다. ‘시장’이 ‘국가’에 밀린 것이다.

하지만 케인스주의도 영원하진 못했다. 정부가 고용을 창출하고 복지 예산을 늘리면 총수요를 확대할 수 있다고 했으나, 높은 실업률과 만성적 스태그플레이션이 지속되면서 고전파 경제학의 유전 형질을 물려받은 신자유주의에 패권을 넘겨줬다. 신자유주의 또한 1970년대 말∼1980년대 초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지원에 힘입어 최근까지 30여 년간 지배적인 경제체제로 군림했으나 최근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몰리고 있다.

○ 케인스주의의 부활인가

“우리는 이제 모두 케인지언(케인스주의자)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마틴 울프 씨는 최근 칼럼에서 서두를 이렇게 시작했다. 1971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대공황 극복에 기여했다는 점을 들어 케인스에게 찬사를 보내며 했던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울프 씨뿐 아니라 글로벌 경제위기를 맞아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 등도 케인스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미국의 채권투자회사 ‘핌코’의 투자책임자 윌리엄 그로스 씨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이제는 뉴욕이 아니라 워싱턴이다”고 말했다. 미국 경제를 좌우하는 중심이 ‘시장’에서 ‘정부’로 이동했다는 뜻이다. 한때 ‘월가의, 월가에 의한, 월가를 위한 국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국의 정책을 좌우했던 월가는 지금 새 정부의 부양책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처지가 됐다.

다윈의 자연선택론에 따르면 케인스주의는 1970년대 초반 경제 환경에 맞지 않아 ‘도태’됐던 시스템이다. 그러나 환경 변화에 따라서 변이는 어떤 식으로든 일어날 수 있다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볼 때 현재의 경제 환경은 뉴 케인스주의로 볼 수 있는 ‘변이’의 발생을 부채질하고 있다.

대표적 케인지언인 크루그먼 교수는 최근 인터뷰에서 “케인스의 업적은 오늘날 우리의 곤경을 해결할 좋은 가이드”라면서 규제와 누진세제, 과감한 재정지출을 주문했다. 파산 위기의 금융회사들과 제조업체들에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을 투입하려고 하는 정책 등이 이미 케인스주의의 등장인 것이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도 지난해 12월 “모든 나라가 경기 부양책을 실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 다윈의 눈으로 본 신자유주의의 미래

케인스주의가 부활하면서 신자유주의가 과연 경제 환경의 적자(適者)이며 그 미래가 어떤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단기적으로는 정부 차원의 대규모 부양책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신자유주의가 위축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옹호론자들은 “대공황 당시 케인지언의 부양책은 높은 실업률과 스태그플레이션만 일으킨 채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며 “이번 위기도 케인스주의에 따른 임시처방보다 신자유주의의 토대 강화에 더욱 힘을 기울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하이에크학회장인 민경국 강원대 교수는 “지금 시장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신자유주의 때문이 아니라 통화 정책, 부동산 정책 같은 데서 국가의 개입이 필요 이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라며 “재산권과 자유를 더 철저히 보호해주면서 시장원리를 강화하면 경제는 다윈의 진화론에서처럼 자연선택과 자연도태를 스스로 반복하면서 순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진화경제론’을 쓴 유동운 부경대 교수는 “다윈주의자의 시각에서 본다면 지금까지 신자유주의를 완벽하게 해본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면서 “신자유주의 원칙을 유지한다면 시장경제는 이번에 드러난 문제점을 스스로 보완할 것이며 위기를 계기로 더 효율적인 형태로 발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키워드로 다윈 읽기]맬서스 인구론

인구증가 따른 생존투쟁 분석

다윈에 ‘적자생존’ 힌트 제공

1838년 10월 어느 날 찰스 다윈은 한 권의 책을 재미 삼아 읽기 시작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자연선택론의 핵심 개념인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의 뼈대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 책은 토머스 맬서스(1766∼1834·사진)의 ‘인구론(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이었다. 맬서스는 이 책에서 인구 급증에 따른 식량 부족 사태가 발생하면 ‘생존투쟁(struggle for existence)’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이 구절이 다윈에게는 적자생존의 개념을 세우는 단초가 된 것이다.

인구학자이자 영국 최초의 정치경제학 교수(동인도회사대학)였던 맬서스의 인구론은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느는 데 반해 식량 공급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1인당 식량 공급량이 감소할 것이라고 예측한 책이다. 사회적 빈곤이 생기는 원인을 인구 증가와 식량 공급의 불균형에서 찾은 것이다.

1836년 10월 비글호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다윈은 1837년 7월부터 하나의 종이 새로운 종으로 분화하는 계통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진화가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메커니즘을 설명할 이론을 찾고 있었다. 적합한 이론을 찾던 중 우연히 만난 책이 생존투쟁을 분석한 인구론이었다.

다윈은 이 책을 읽으며 생물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수준보다 훨씬 더 많은 자손을 생산한다면 환경에 더 잘 적응한 개체들이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 개념을 떠올리게 된다.

다윈은 자서전에서 “인구론을 통해 ‘생존투쟁에서 적합한 변이는 보존되고 부적합한 변이는 파괴되며 그 결과 새로운 종이 출현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론 틀을 갖추게 됐다”고 했다. 맬서스의 인구론이 다윈의 사고를 촉진했던 것이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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