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비싼 물건 포장땐 서민 생각에 씁쓸”
12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1층 포장코너 앞은 한산했다.
이 포장코너를 운영하는 선물포장업체 ‘현대아트’의 이충진(48) 김정숙(45) 씨 부부는 “외환위기 때도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는데…”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 부부는 1982년 서울 중구 명동 제일백화점, 1985년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본점을 거쳐 1988년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오픈 때부터 지금까지 28년째 백화점에서 선물 포장을 맡아왔다.
마침 이날 오후부터 전현직 국세청장의 ‘고가(高價) 그림 로비 의혹’이 불거져 나왔다.
아내 김 씨는 “1998년 김태정 전 검찰총장의 부인 연정희 씨의 ‘밍크코트 로비’ 때 우리 가게 앞으로 취재진이 몰려 왔었다”며 “서민들은 살기 어려운데, 사회 고위층의 값비싼 선물을 접하면 씁쓸하다”고 말했다.
○선물 체감 경기, 올해가 최악
이 씨 부부에 따르면 과거 설 명절 땐 포장코너 앞이 장사진을 이뤘다고 한다. 각 기업체로 출장을 나가 직원들 선물을 밤새 포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선물 체감 경기’는 얼어붙었다고 한다.
현금을 봉투나 헝겊으로 포장한 선물은 크게 줄고 대신 바겐세일 때 산 털외투와 스웨터 등 따뜻한 옷 선물이 늘었다. 포장은 재활용할 수 있는 보자기나 리본 상자가 인기다.
“외환위기 때보다 요즘 사람들 수중에 돈이 없는 것 같아요. 펀드는 반 토막 났지, 집을 처분하려 해도 안 팔리지…. 중산층 주부들도 ‘애 아빠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아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해요.”(김 씨)
옆에 있던 이 씨도 “매년 오던 대기업 임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걱정된다”며 아내 말을 거들었다.
청와대도 물건 맡겨… 빌게이츠에 줄 선물 포장도
○“투명하게 선물 주고받을 수 있는 사회 됐으면”
이 씨는 그동안 청와대의 선물 포장 의뢰도 많았다고 털어놨다.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 방북 땐 홍삼을, 지난해 아랍 왕실 고위 인사들의 방한 때는 한국 전통매듭을 포장하기도 했다.
김 씨는 “노무현 정권에선 선물을 가져오지 않고 박스만 주문해 갈 때가 많았는데, 현 정권에선 직접 선물을 가져와 포장을 맡긴다”며 “과거보다 선물이 투명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부부는 흐뭇한 사연이 담긴 포장도 많이 했다.
자신을 선물 삼아 포장코너에서 빨간 리본을 목에 매고 애인을 만나러 간 남자, 요리를 공부하는 친구에게 파와 당근 등 각종 야채를 꽃다발로 만들어 선물한 여자…. 지난해 방한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는 MS 제품을 받는 걸 좋아해 한국MS는 국내에서 팔리는 이 회사 제품들을 그에게 선물하기도 했단다.
이 씨 부부는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의 차녀인 구혜정(60) 씨를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솔선수범)를 실천하는 대표적 인사로 꼽는다. 늘 작은 선물들을 가져와 포장하곤 하는데, 알고 보니 남몰래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것이었다고.
이들은 “선물은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더 행복한 것 같다”며 “선물을 주고받는 정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