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상황을 누가 상상했겠는가
《28일부터 다음 달 1일까지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리는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에 참석 중인 김영훈(사진) 대성그룹 회장이 현장에서 느낀 점들을 정리해 30일 본보에 기고했다. 세계에너지협의회(WEC) 부회장이기도 한 김 회장은 세계 정·관계 및 재계 지도자들이 모이는 이번 행사에 2003년부터 7년째 참석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문 요약.
○ ‘경제위기는 미국 탓’ 팽배
올해 다보스포럼은 예년보다 진지하고 긴장된 분위기였다. 특히 고정적으로 다보스포럼에 출석했던 많은 ‘스타 최고경영자(CEO)’가 올해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과거 다보스포럼에서 주목을 받았던 헤지 펀드의 주인공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거나 힘이 빠진 모습이었다.
29일 오전에는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조찬 모임에 참석했다가 미국 퀀텀펀드의 조지 소로스 회장을 만났다. 과거 외환위기 때 한국을 찾아와 대성그룹에 투자 제안을 했던 인연도 있어 잠시 얘기를 나눴는데, 예전의 기세등등하던 태도가 많이 누그러진 느낌이었다.
포럼에서는 이번 세계 경제위기의 진원지가 미국 또는 월가라는 시각이 팽배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는 개막 연설에서 “세계 경제위기는 미국의 잘못된 경제시스템 운용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모든 것이 미국 책임”이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재미있는 것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이에 대해 미국의 잘못을 인정하고 수긍했다는 점이다. 인도계 여성으로 미국의 대표적 스타 CEO인 인드라 누이 펩시 회장도 “월가가 현재의 경제위기라는 재앙을 초래했다”며 미국 공격에 한몫 거들었다.
그러나 푸틴 총리는 과거 러시아 역사를 언급하며 “기업 부진과 시장 혼란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지나친 경제력 독점과 시장 개입은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에 다보스포럼의 회장이자 설립 멤버인 클라우스 슈바프 제네바대 교수는 “미국은 부실자산을 인수해 민간 기업을 국유화하고, 러시아 총리가 자유경제 원칙을 역설하는 현상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느냐”고 말했다.
○ ‘에너지 안보’ 구상 흥미로워
이번 다보스포럼에서 느낀 바를 종합하면 전 세계 지도자들이 현재의 경제위기를 역사적인 중대 사건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위기 이후의 세계 재편’이라는 올해 다보스포럼 주제에는 이번 경제위기가 1930년대 대공황에 비견된다는 함의(含意)가 들어 있다.
그러나 각종 세션에서 발표자들이 제안한 처방들은 대체로 공익 추구나 효율적인 규제 및 감독, 약자 배려 등 상식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세계적인 경기 불황의 시발점이 된 에너지 가격의 과도한 변동성을 제어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장질서로 푸틴 총리가 과거 유럽의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같은 에너지 안보체제를 제안한 것은 관심이 가는 대목이었다.
이 제안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ECSC가 오늘날 유럽연합(EU)으로 발전한 것처럼 세계 경제나 정치 통합에도 기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쿠웨이트 국영석유회사(KPC)의 사드 알슈와이브 CEO를 만났는데, 그는 올해 유가 전망에 대해 “연말까지 배럴당 50달러 정도로 예상한다”며 “유가가 70달러를 밑돌면 석유회사들이 신규 투자나 정상적인 영업을 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한숨을 지었다.
시리아 기업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나하스 엔터프라이즈그룹 사에브 나하스 대표는 “‘마셜 플랜’에 버금가는 중동 재건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그런 프로그램이 가동되면 한국처럼 대규모 토목 사업 능력이 있는 나라에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도 한국 기업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사업에 참여하고 싶다는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