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계열 증권사들이 시장 주도 가능성
중소 자산운용사 상당수는 ‘생사 소용돌이’
자본시장통합법(자통법)의 시행으로 국내 금융업계가 지각변동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앞서 영국은 1986년 한국 자통법의 모태(母胎)라고 할 수 있는 금융서비스법(FSA)이 실시되면서 금융산업의 대대적인 ‘빅뱅’을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증권회사의 90%가 도산했고 일부는 은행과 외국계 투자은행(IB)에 인수합병(M&A)됐다. 호주에서는 자통법과 비슷한 내용의 ‘금융서비스개혁법’이 2001년 시행된 뒤 ‘맥쿼리’와 같은 글로벌 IB가 탄생했다.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 국내 증권업계가 대기업과 은행자본 계열의 증권사로 양분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소액지급 결제 기능이 도입되면 대기업들은 계열 증권사를 통해 그룹사와 하청업체 근로자들의 급여를 줄 수 있다. 물론 증권사는 이 돈으로 대출이나 투자 등을 할 수는 없지만 증권사가 개발한 다양한 금융상품으로 돈이 흘러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이런 시각은 이미 증시에도 반영됐다. 금융업종의 침체 속에서도 삼성그룹의 자금을 수신할 수 있는 삼성증권 주식은 연일 최고의 추천 종목이 되고 있다.
현대·기아차와 현대중공업그룹이 각각 신흥증권(현 HMC증권)과 CJ증권(현 하이투자증권)을 인수한 것도 자통법 시행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LS그룹 두산그룹 등이 증권사를 인수한다는 소문도 끊이지 않고 있다.
경제평론가 박경철 씨는 “이제 대기업들이 금융자본을 이용하지 않고도 계열 증권사가 운용하는 펀드로 경쟁 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펀드 자본주의’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투자 하나대투 굿모닝신한 등 은행계 증권사들은 자본금 확충이 상대적으로 쉬운 강점을 살려 증권업계의 지각변동에서 한 축을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대기업 소유의 증권사보다 내부 규제가 많아 특색 있는 상품 개발이 쉽지 않을 것이란 지적도 있다. 온라인에 특화해 증권거래 수수료로 흑자를 내는 일부 소형 증권사는 살아남기 위해 틈새시장을 공략할 태세다.
자통법 시행 초기에는 국내 증권사보다 외국계 증권사의 입지가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금지 사항만 위반하지 않으면 나머지는 모두 허용하는 ‘네거티브’ 방식이 도입됨에 따라 파생상품 노하우 등에서 앞선 외국계가 다양한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증권사들이 직접 자산운용을 할 수 있게 되면서 국내의 중소형 자산운용사는 생존경쟁에 내몰리게 됐다. 한국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50여 개의 자산운용사 중 경쟁력이 없는 운용사의 상당수는 대형 증권사나 외국계 IB에 먹히거나 치열한 경쟁에 밀려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