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화이트칼라에서 실직
담보도 보증도 없던 내게 길 열려…
최선 다해 단골 확보할 겁니다
나처럼 희망잃은 가장들에게 희망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하루도 안 쉬고 매일 오전 9시 반부터 오후 8시 반까지 꼬박 11시간을 4평(약 13.2m²) 남짓한 가게에서 보내는 이원기 씨(48). 그는 “노는 것보다 일하는 게 더 즐겁다”고 말한다.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주엽동 문촌프라자 1층에 있는 ‘만능사 일산점’은 이 씨의 소중한 일터다. 구두수선을 전문으로 하면서 열쇠 제작과 도장 새기는 일도 병행한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만능점이다.
1월 14일에 문을 연 이 가게에서 이 씨는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 택시조합 관리직으로 10년간 근무했던 그는 보험업, 광고업, 금융업 등 다양한 업종을 거치며 사무직으로 일했던 전형적인 화이트칼라였다.
3년 전 실직한 뒤 재취업에 번번이 실패하자 이 씨는 사무실에서 와이셔츠를 입고 일하던 기억은 잊고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다짐했다. 동갑내기 친구가 오랫동안 해온 구두 수선업에 관심이 끌렸다. 6개월간 매일 친구 가게로 출근해 기술을 익혔다.
기술은 배웠지만 아무런 담보도 보증도 없는 그에게 돈을 빌려줄 금융기관은 없었다. 우연히 동아일보에서 하나희망재단의 무담보 소액신용대출(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 기사를 본 이 씨는 2000만 원의 창업지원비를 빌려 가게 문을 열었다.
그는 “매일 집에 있던 아빠가 일을 하기 시작하니 두 아이가 더 좋아한다”며 “아이들이 ‘아빠! 가게 무지 좋다’고 할 때마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고 말했다.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단골을 많이 확보할 겁니다. 그래서 나처럼 한때 희망을 잃었던 가장들에게 희망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서 수입쇠고기 총판점을 시작한 지 한 달째인 강병선 씨(49·여)는 엊그제 매출 결산을 해본 뒤 자신감을 얻었다. 그는 “모든 희망을 걸고 무조건 열심히 했는데 인건비, 임차료 등등을 빼고 순이익이 370만 원 정도 나왔다”며 “첫달이라 이것저것 들어간 돈이 많은데도 이익이 나서 기쁘다”고 말했다.
10년 전 외환위기로 남편의 사업체가 부도나면서 강 씨는 순탄한 전업주부 생활을 접어야 했다. 남편과 이혼한 뒤 싱글맘으로 두 자녀를 키워온 그는 “부도로 인한 채무로 신용불량자가 돼서 어디에서도 돈을 빌릴 수 없었다”며 “10년간의 힘들었던 생활이 이번 창업으로 전환점이 되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경기침체가 본격화하면 저소득층이 받는 충격이 더 크고 일자리를 잃는 사람도 늘어나기 때문에 마이크로크레디트를 적극적 의미의 사회안전망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에서는 하나희망재단, 신나는조합, 사회연대은행, 아름다운재단 등이 자체 출연한 기금이나 기업, 개인, 정부로부터 받은 지원금으로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을 벌이고 있다.
정영순 이화여대 사회복지전문대학원 교수가 2003∼2007년 5년간의 사회연대은행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을 분석한 보고서에 따르면 사회연대은행에서 지원받아 창업한 391개 업체의 창업생존율은 88.2%로 일반 영세 자영업자 생존율(20%)의 4배 수준이다.
사회연대은행은 실제소득이 전국가구 월평균소득의 60% 이하인 가정을 대상으로 신청을 받고 있다. 이 밖에 △생명보험 사회공헌위원회 △서울 강남구 희망실현창구 △아름다운재단(대구) 등도 저소득층 중 창업을 희망하는 가구를 대상으로 마이크로크레디트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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