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단계 검증 뒤엔 배출량 할당→배출권 매매 거치게 돼
5일 오후 충남 태안군 원북면 한국서부발전의 태안 발전소. 파스텔 색상으로 칠한 공장은 푸른 바다와 어울려 마치 유럽의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배경의 효과 때문인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수증기도 이국적이었다.
하지만 기자는 이내 감상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하얀 수증기, 아니 그 안에 들어 있는 이산화탄소는 오존층을 파괴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태안 발전소는 선진국의 유수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온실가스와 사활을 건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 첫 단계 ‘검증’
온실가스는 이산화탄소, 메탄, 아산화질소 등 6개 물질로 이뤄져 있다. 이 중 이산화탄소가 약 89%를 차지한다. 이 같은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려면 먼저 자기 회사가 어디에서 얼마만큼의 온실가스 물질을 배출하는지부터 파악해야 한다.
기자와 동행한 박경순 에너지관리공단 온실가스검증원은 배로 유연탄을 실어와 가루로 분쇄한 다음 보일러에 넣어 연소시키는 전 과정을 하나하나 되밟았다.
발전소가 제대로 유연탄 투입 내용을 기재하고 있는지, 중간 과정에서 에너지 누수가 없는지를 꼼꼼히 챙겼다. 전산실에서 과거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지도 주요 체크 포인트였다.
이 과정에서 문제가 없다면 의외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구하는 것은 간단했다. 투입한 유연탄 양에 미리 정해져 있는 이산화탄소배출계수를 곱하면 된다.
이승희 한국서부발전 기후환경팀 과장은 “전기를 만들기 위해선 유연탄 등 연료를 24시간 태워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온실가스가 대거 발생한다”며 “정부가 온실가스 감축량을 할당하면 큰 부담이 될 것이어서 미리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 마무리는 탄소배출권 거래
검증은 탄소배출권 거래의 가장 기초 작업이다. 이후에는 기업별로 온실가스 할당량이 배분되고, 각 기업은 할당량만큼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여야 한다. 할당량보다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면 탄소배출권을 사야 한다.
교토의정서에 따라 의무적으로 온실가스를 줄여야 하는 37개 선진국은 이미 기업별 할당량을 배분받아 감축 노력을 하고 있다. 일본 등 일부 국가는 정부가 강제로 할당량을 배분하는 게 아니라 기업이 자율적으로 온실가스를 감축하는 모델을 택했다.
한국 정부도 25일 국무회의를 열어 ‘저탄소 녹색성장기본법안’을 의결했다. 이 법안은 온실가스 검증부터 탄소배출권 거래에 이르는 ‘한국형 온실가스 정책’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정부는 이르면 4월 임시국회에서 이 법안을 통과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 향후 수출과도 직결
최근 유럽 기업들이 해외에서 물품을 구매할 때 온실가스 배출 정보를 요구하는 사례가 늘고 있어 향후 온실가스 검증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LG화학은 “최근 유럽 기업들이 재료를 구매하면서 탄소배출량 정보를 요구하는 사례가 부쩍 늘었다”며 “유럽 기업들은 제품 전 과정에 대한 환경영향평가(LCA)를 강화하면서 완제품뿐만 아니라 원재료의 탄소배출량까지 점검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온실가스 배출이 많은 물품에 세금을 부과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지식경제부 기후변화정책팀은 “유럽 기업들이 온실가스에 특히 민감하다”며 “해외 기업이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해 만든 물건이 유럽으로 넘어오면 그 물품에 국경세를 부과하려는 추세가 강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태안=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 한국의 현주소
배출량 검증받은 기업 50여개뿐
결론적으로 말해 ‘낙제점’ 수준이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최근 매출액 상위 200개 기업을 분석해 ‘산업계 기후변화 경쟁력지수(KCCI)’를 계산했는데 100점 만점에 33.9점에 불과했다. KCCI는 올해 처음 만들었기 때문에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점을 감안해도 형편없이 낮은 점수다.
기업들은 기후 변화에 대응할 필요성은 인식하고 있었지만 실제 투자는 미흡한 것으로 조사됐다.
본보가 최근 정부 지정 7개 온실가스 검증 전문기관에 확인한 결과 온실가스 배출량 검증을 받은 기업은 한국전력공사, 한국석유공사, 삼성전자, LG화학 등 50여 개에 불과했다.
온실가스 검증은 자기 회사가 얼마만큼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는지 공인기관으로부터 확인받는 것으로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가장 먼저 거치는 과정이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유럽환경기구(EEA) 자료에 따르면 2008년 말 현재 독일 1942개, 프랑스 1100개, 스페인 1066개, 이탈리아 1044개 기업이 온실가스 검증을 받았거나 받을 예정이다.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