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나도 회사채 발행 나서
지난달 8조원 작년 4배로
“투자용보다는 불황대비용”
경기침체가 당초 예상보다 오래 지속될 것이 확실시되자 기업들이 현금 확보에 필사적으로 나서고 있다.
특히 은행들이 자금줄을 조이면서 기업들은 회사채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로 눈을 돌리고 있다. 당장 돈 쓸 곳이 있어서라기보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비하는 차원이다.
이는 기업들이 지난해 가을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어서다. 당시 시장경색이 극한으로 치닫고 ‘돈줄’이 말라붙는 바람에 많은 기업은 생사의 기로에 놓였다. 지금은 시장 불안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채권 투자열기도 달아올라 여건이 다소 나아졌지만 언제 다시 폭풍우가 닥칠지 모를 일이다.
○ 꽉 막힌 은행 차입 회사채로 돌파
12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달 회사채 발행액은 8조1531억 원으로 지난해 2월(2조540억 원)의 4배 수준이나 됐다. 이달에도 12일까지 3조4120억 원의 회사채가 발행돼 2월과 비슷한 추세를 유지하고 있다.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지난해 10월 회사채 발행액은 1조6123억 원에 불과했다.
이런 움직임은 대기업들이 주도하고 있다. 평소 같으면 현금을 넉넉히 쌓아놓고 채권시장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던 대기업들이 올 들어서는 회사채 발행을 통해 자금을 수천억 원씩 끌어 모았다.
삼성그룹은 삼성물산, 제일모직 등이 회사채를 발행했고 SK그룹은 SK텔레콤, SK네트웍스 등 주력 계열사를 중심으로 5000억 원이 넘는 돈을 조달했다. 포스코(5000억 원), KT(4000억 원), 현대차(2000억 원) 등 업종별 대표 기업들도 이 대열에 가세했고 수년간 업황 호조로 현금을 두둑이 쌓아놨던 대형 해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올 들어 회사채를 발행한 그룹 계열사 관계자는 “특별히 용도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앞으로의 경영환경이 그다지 좋을 것 같지 않아서 선제적으로 자금을 확보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사실상 은행권에서는 차입 자체가 안 되는 상황”이라며 “금리조건도 직접 조달 시장이 은행권에 비해 불리하지 않다”고 말했다.
○ 비상용 운영자금이 많아
그러나 기업들로 향하는 시중자금이 투자로 이어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2월 발행계획이 신고된 회사채 중 용도가 ‘시설투자 자금’으로 분류된 비율은 10%도 되지 않았다. 대부분 단순한 회사 운영자금, 기존 채권 차환자금 등의 용도였다.
한 대기업의 IR 담당자는 “신규투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3월 이후 매달 차입금 상환을 해야 하기 때문에 급히 채권을 발행했다”며 “들어오는 자금은 머니마켓펀드(MMF)처럼 수시입출금이 가능한 계좌에 넣어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시중자금의 부동화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으로 우려된다. 금융회사를 제외한 일반 법인의 MMF 잔액은 올 1월 현재 12조 원을 넘었다.
이처럼 기업들의 자금 확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일부 기업은 자금난에 빠진 것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아시아나항공은 신주인수권부사채(BW) 1000억 원어치를 발행하겠다고 발표한 9일 주가가 3% 넘게 급락했다. 기아차도 최근 BW를 발행한다는 소식이 나온 이후 주가가 한동안 약세를 면치 못했다.
자금 조달을 한다는 뉴스가 나오면 시장에서 ‘얼마나 어려웠으면 그렇게 급히 돈을 끌어 모으려 할까’ 하는 식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