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사이… 국책은행장의 딜레마

  • 입력 2009년 3월 19일 02시 53분


김동수 수출입은행장 조선 납품업체 탐방기

■ 자금난 애타는 중소기업

“기술력 있는데 돈때문에…

대출 안되면 보증이라도”

■ 지원 적합지 찾는 金행장

“일자리 늘리는 게 내 소임

고용 많은 곳에 돈도 더”

《“선박엔진과 풍력발전기 부품인 ‘샤프트’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임금이 싼 외국 업체에 못 맡기죠.”(신동수 ㈜평산 대표)

“그럼 국내 고용 창출에 큰 도움이 되겠군요.”(김동수 한국수출입은행장) 정부와 국책은행들이 중소기업 지원 규모를 크게 늘리기로 함에 따라 중소기업들이 유리한 조건으로 대출을 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실제로 김 행장이 만난 평산의 신 대표는 기술력을 강조하면서 대출한도 증액을 요청했다. 일자리를 늘리는 효과가 큰 기업이어서 지원 가능성이 높은 편. 김 행장은 “중소기업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다 보면 올해 수출입은행이 사상 처음으로 적자를 낼 수도 있겠지만, 경기를 살리고 일자리를 늘리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감수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 자금난 조선업계 전반으로 확산

16일 오전 11시 반 부산 웨스틴조선비치호텔. 수출입은행과 대형 조선사들은 ‘네트워크 대출’ 방식으로 총 4조 원을 중소 납품업체에 지원하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했다.

중소 납품업체가 조선사에서 받아야 할 납품대금을 수출입은행이 대신 준 뒤 이 지급액을 조선사에 대한 대출로 처리하는 것이다. 납품업체에는 대금이 조기에 회수되도록 해 자금난을 덜어주는 한편 조선사에는 부품 관련 외주 제작비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효과를 기대하는 대출방식이다.

취지가 좋은 만큼 협약식에 참석한 중소기업 관계자들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종 화기애애해 보였다. 하지만 이들이 털어놓는 속내는 그리 편치 않았다. ‘현실이 녹록지 않다’는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강호일 ㈜비와이 대표는 “플랜트 분야의 경쟁력이 뛰어나고 신사업 분야도 준비 중이어서 큰 걱정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큰 회사는 큰 어려움이 있고 작은 회사는 작은 어려움이 있는 시기”라고 덧붙였다. 최고경영자(CEO)로서 회사의 미래를 밝게 보지만 대형 조선사나 중소 납품업체 모두 자금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어서 마음을 놓을 수 없다는 뜻이다.

행사가 끝난 뒤 김 행장은 수출입은행의 이평구 전략금융본부장과 남기섭 여신총괄부장을 불렀다. 김 행장은 “사후관리를 잘해야 한다, 잘나가는 업체에만 대출해 실적을 채우는 식은 안 된다”고 강조했다.

여신 책임자인 남 부장은 연방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부담을 느끼는 듯했다. 자금난이 심한 중소기업에 대출하면 부실채권이 늘 수 있어서다.

○ “더 작고 힘든 업체 찾아 왔더라면…”

협약식이 끝난 뒤 김 행장은 조선 기자재 납품업체인 평산과 엔케이 공장이 있는 부산 강서구 지사과학산업단지로 이동했다.

작년 매출액은 평산이 3700억 원, 엔케이가 2200억 원으로 제법 덩치가 큰 회사들이다.

김 행장이 짧게 한마디 던졌다. “우리가 현장을 찾는 취지에 맞지 않는 회사군요.” 규모가 작고 힘든 업체를 찾아가 지원책을 모색하려 한 당초 의도가 무색해졌다는 지적이었다. 방문업체를 선정한 이경학 수출입은행 부산지점장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큰 회사라고 해서 고민이 없진 않았다.

박윤소 엔케이 대표는 “중국 인도네시아 브라질 등에서 우리 회사의 기술을 원하고 있고 수요도 많다”며 “기술력이 있는 만큼 금융 지원이 되면 더 도약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여신을 늘려 달라, 그게 힘들다면 지급보증이라도 해달라”고 호소했다.

김 행장은 “중소, 중견기업을 지원해 일자리를 늘리는 게 국책은행의 소임”이라며 “적극적으로 지원책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결국 수출입은행은 올해 힘든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뿐 아니라 일자리도 늘리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셈이다. 김 행장은 “고용을 많이 하는 기업에 더 많은 혜택을 주는 방안들을 궁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자금 지원도 선택과 집중 필요

중소기업의 자금난은 부산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최근 금융감독원이 △부산 명지, 녹산공단 △광주 하남공단 △대구 성서공단의 운영실태를 점검한 결과 중소기업들은 대부분 발주업체의 생산 부진으로 심각한 자금난을 겪고 있다.

조선사 협력업체가 많은 부산지역 중소기업들은 과거 몇 년간 수주해둔 물량이 많아 당장 공장 가동을 정지할 정도는 아니다. 명지와 녹산공단 가동률은 80% 선으로 높은 편이다.

하지만 광주 하남공단의 가동률은 65%, 대구 성서공단의 가동률은 60%를 겨우 넘기는 수준. 글로벌 경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석유화학업체와 자동차업체에 기자재를 대는 중소 납품업체가 이 지역에 많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자금난이 지역과 업종을 가리지 않고 전방위로 확산되는 추세여서 모든 중소기업에 일률적으로 자금을 지원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전효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구조조정이 진행 중인 건설 조선 해운업에 대해선 신용도에 따라 지원 규모를 달리하고, 부실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다른 업종에 대해선 완화된 기준으로 지원하는 차별화된 여신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부산=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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