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 오프블로그]‘도쿄의 용산’ 아키하바라도 불황 몸살

최근 경기 불황으로 도쿄 최대 전자상가인 아키하바라 뒷골목에 전자 벼룩시장이 생겨났다. 평소의 절반 가격에 내놓은 USB메모리 MP3플레이어 등이 파란 상자 안에 담겨있다. 도쿄=김범석 기자

신제품 매장 옆에 벼룩시장 성업… 중고 하드웨어 잘 팔려

“고햐쿠엔(500엔), 고햐쿠엔데스(500엔입니다)!”

15일 오후 일본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 구 아키하바라(秋葉原) 전자상가. JR 주오센(中央線) 오차노미즈(御茶ノ水)역 방향으로 뻗은 뒷골목에 진풍경이 벌어졌습니다. 10여 개의 파란색 상자가 놓인 이 골목에 수십 명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들은 마치 재래식 화장실에서 ‘큰 일’을 보는 듯한 자세로 모두 일렬로 쪼그려 앉아 상자 안을 뒤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불러 모은 것은 다름 아닌 한 남성의 외침, 바로 “고햐쿠엔”이었죠. 정확히 말하자면, 이 남성은 1GB(기가바이트) 용량의 휴대용 저장장치인 USB메모리를 500엔(약 7230원)에 팔고 있었습니다. 뭐 이렇게 싼 경우가 다 있을까요? 기자 역시 쪼그려 앉은 무리들 틈을 비집고 상자를 들여다봤습니다. 보이스리코더, MP3플레이어, 닌텐도DS 게임기 등 비닐에 쌓인 전자제품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브랜드도, 포장도 제각각인 제품들….

“고햐쿠엔”을 외치는 그는 혹시 장물아비가 아닐까?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그는 바로 중고 전자제품 판매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서 있는 이 뒷골목은 바로 아키하바라의 ‘전자 벼룩시장’이었죠.

도쿄의 ‘용산전자상가’로 통하는 아키하바라. 최근 이 지역에는 뒷골목을 중심으로 전자제품 벼룩시장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습니다. 자신이 쓰던 USB메모리부터 MP3플레이어 같은 휴대용 전자기기, 심지어 닌텐도DS의 터치펜 같은 소모품이나 턴테이블 등 옛날 ‘전축’ 물건까지 다양한 중고 제품들로 넘쳐납니다. 비교적 싼값에 내다 팔거나 사려는 사람들이 몰리면서 이곳은 왕복 8차로 메인 도로인 ‘주오도리’와 맞먹을 정도로 활기를 띱니다.

가격은 천차만별이지만 대략 정가의 절반 이상을 넘지는 않습니다. 가장 인기 있는 USB메모리의 경우 가격은 500엔(1GB)에서 1500엔(8GB·약 2만1700원), 보이스리코더는 3000엔(4만3400원)에서 5000엔(7만2340원) 선이었습니다. 현장에서 조건을 맞춰보고 물물교환을 하는 사람들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소프트웨어는 남이 쓰던 것을 쓰더라도 기능에 거의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드웨어는 다릅니다. 일단 고장이나 흠집이 난 물건을 살 마음이 어지간해서는 생기지 않는 법이죠. 따라서 하드웨어 벼룩시장의 인기는 이색적입니다. 그것도 신제품 판매장에서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에 벼룩시장이 성업 중이라니….

하지만 경기 불황으로 어쩔 수 없다는 것이 벼룩시장을 찾는 일본인들의 대답입니다. 한 손님은 “잘만 고르면 새 것을 반값에 가져갈 수 있는데 체면을 차릴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더군요. 최근 일본경제연구센터는 올해 일본 경제성장률을 ‘―3.6%’라 발표했는데, 이는 지난해(―2.6%)에 비해 1%포인트 더 떨어진 수치라고 합니다.

오늘도 번쩍거리는 메인 도로를 지나 굴다리 밑 파란 상자 주위에 모여든 일본인들. 카드를 내밀며 폼 나게 전자제품을 사던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이들은 오늘도 악착같이 쪼그려 앉아 중고제품 박스를 뒤지고 있습니다.

도쿄=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