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 체제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물가를 억누르고 호황을 오래 누릴지 고민해 왔다. 하지만 경기 팽창은 늘 물가 상승을 불러왔다. 어찌 보면 인플레이션은 건강한 경기순환에 반드시 필요한 ‘브레이크’인지도 모른다. 다만 이는 정상적 경제구조에서 통하는 얘기다. 만일 경기에 비해 돈의 힘이 너무 강해 물가만 잔뜩 오르고 경제가 쭈그러드는 악성 인플레이션의 상황이라면 이건 정말 골칫덩어리다.
다행히 1979년 제2차 오일쇼크 이후 전 세계는 심각한 물가위협을 피해왔다. 중앙은행의 역할 증대와 신흥국의 값싼 노동력, 적절한 기술 진보, 자유무역과 정책공조 또한 지구촌 물가안정의 숨은 공로자였다.
하지만 이제 사정은 달라지고 있다. 미국과 영국은 이미 국내총생산(GDP)의 7%와 20%의 돈을 은행권에 쏟아 부었는데 특히 미국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자금을 금융부실 처리에 투입해야 할지 미지수다. 또한 각국 정부는 경기부양으로 올해에만 약 1조7000억 달러를 투입하고 이를 위해 대규모 국채발행과 적자재정을 감내해야 한다. 1990년대 중반부터 10년간 평균 7% 언저리였던 선진 5개국의 총유동성 증가율이 지난해 이미 11%를 뚫었고 현재 역사적 최고치를 터치하고 있다. 이제 지구에 풀린 돈은 누가 봐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조절할 수 있는 수위를 넘어섰다.
그래서 다음에 상상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다. 첫째는 언젠가 경기가 돌아서고 인플레이션이 본격 엄습하는 과정에서 물가와 금리가 사정없이 올라가는 그림인데, 이 경우 경기회복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통화긴축은 가공할 속도를 보일 것이다. 둘째는 경기회복이 느려 돈이 단기유동성이란 이름의 울타리 안에 계속 갇혀 있는 경우인데, 이때라도 간헐적인 경기호전 기대감은 자산가격을 널뛰기시켜 통화 당국을 곤경에 빠뜨릴 것이다.
아직 디플레이션을 우려하는 현실에서 어떤 경우나 인플레이션이 주는 완만한 자산가격 상승은 반길 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 다음에 올 거침없는 물가상승은 세계 경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또 다른 차원의 시련일 수 있다. 특히 그 인플레이션이 미국 달러가치의 폭락에서 유발되는 것이라면 혼돈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물론 오늘 당장 인플레이션을 걱정해 어떤 비장한 결단을 내려야 할 상황은 아니다. 그렇게 이른 시간 내에 돈이 돌아 물가가 뛰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 활성화될지는 몰라도 ‘인플레이션 바이러스’가 지구촌 곳곳에 빠르게 퍼지고 있는 마당에 이를 무시하고 중장기 자산관리 전략을 짠다는 것은 너무나 안일하고 태평한 태도라 할 수 있다. 돈은 무리하게 찍어낸 만큼 반드시 고통을 주게 돼 있다.
김 한 진 피데스투자자문 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