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초 어디부터 손댈지 막막
통화긴축 강력히 밀어붙이자
“현실 무시한 정책” 비난 일어
나에게는 재정금융정책이 생소한 분야는 아니었다. 박사과정에서 금융정책을 전공했고,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귀국 후에 유솜(USOM·미국 대외원조처)의 위촉으로 통화관리 상태를 조사 분석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실무자들의 브리핑을 들어보니 과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금융과 세정 분야의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것이 급선무이니 각별한 노력을 해달라고 당부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결국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은 과잉 팽창된 통화량을 수축해 인플레이션 압력을 완화하는 동시에 환율을 현실화하고 금융질서를 쇄신하는 한편 세무, 관세 행정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불행하게도 나는 취임하자마자 관세청 공무원에 대한 대대적인 숙정작업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됐고 이어서 세무 공무원의 숙정도 단행했다.
금융 부문의 문제는 더 심각했다. 한국에서는 자고로 선거 때만 되면 통화량이 급팽창했다. 정부의 선심 행정으로 예산이 팽창하고 금융이 방만해지기 때문이었다.
1969년 이른바 3선 개헌을 치른 직후 취임한 나는 통화관리 상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매년 국제통화기금(IMF)과 재정안정계획을 약정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한데 집행 실적을 보니 통화량이 약정액을 크게 초과했는데도 계수상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분식돼 있는 것을 알게 됐다. 결국 재무부가 국민과 국제기관을 속인 결과가 됐으니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물론 계수를 현실화할 수밖에 없는데 언론과 국회, IMF가 어떻게 나올지 모를 일이다.
결국 정면돌파를 시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어느 날 출입기자들을 불러놓고 사태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며 국제기관의 눈도 있으니 과대보도를 삼가달라고 간청했다. 다행히 출입기자들은 나의 충정을 이해했는지 크게 보도하지 않았고, 일단 불은 끈 것 같이 느껴졌다.
같은 해 11월 3일 환율을 대폭 인상하고 현금차관 동결, 수입억제 완화 등 물가 및 국제수지 방어대책을 실시하고, 11월 15일에는 세수 증대를 노린 8개 세법의 개정안을 발표했다.
그러던 중 각 신문이 내가 이전에 보도 자제를 부탁했던 통화량 계수 조작 건을 터뜨렸다. 그 후 나는 언론과 국회에서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다. IMF에는 이런 과오를 방지하기 위해 새로운 통화관리 방식을 제안해 그때부터 ‘본원적통화’와 ‘통화승수’의 분석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강력한 통화긴축정책도 밀고 나갔다.
초긴축이라며 언론이 떠들고 은행과 기업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규제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법정지급준비율을 이행하지 않는 은행에 가차 없이 과태료를 부과했다. 일찍이 그런 일을 당해 본 일이 없었던 금융계와 정당 일각에서는 철없는 교수가 현실을 무시한 정책을 강행한다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이 어수선한 사태를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돼 어느 날 청와대 비서실에 대통령 면회를 신청했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