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中)은 치우치지도 않고(不偏), 기울지도 않고(不倚),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상태다(無過不及)! 용(庸)은 언제나 그렇게 하라는 것(平常)이다.”
12세기 신유교를 제창했던 주희(朱熹)가 내린 중용(中庸)의 정의다. 이 관점에서 보면 김연아의 완벽한 피겨스케이팅 연기는 ‘중용의 극치’다. 연기에 녹아 있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평형성은 미(美)와 선(善)이 어우러져 나오는 중용의 완벽함이다.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평형을 이루고 있는 연기 속에는 정지된 평형이 아니라 역동적 평형, 일시적 균형이 아니라 지속적 균형이 느껴진다. 중용은 간단히 말하면 역동적이며 지속적인 평형이다.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공급(孔伋), 일명 자사자(子思子)가 쓴 책 이름이기도 하다. 아울러 동아시아에서 리더의 가장 중요한 경영 철학으로 여겨져 왔다. 중용은 모든 사람들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A와 B의 수학적 중간이 아니다. 개별적인 상황을 고려하고, 역동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에 따르는 황금률이다.
중용은 이도 저도 아닌 중간도 아니다. 때로는 나아가고 때로는 물러설 줄 아는 진퇴(進退)의 결정이고, 때로는 분노하고 기뻐할 줄 아는 감정의 평형이다. 조직 내에 옳지 못한 결정이 내려질 때 중립을 지킨다고 침묵하거나, 조직의 생존을 위협할 만한 불의에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적당히 타협하는 자세는 중용이 아니다.
중용은 실천이다. 그 실천은 평형성과 지속성을 담보로 해야 한다. 중용은 ‘주어진 상황(時)’에 ‘가장 적합한 답(中)’을 찾아내는 시중(時中)이기도 하다. 세상은 무한히 변화한다. 수시이처중야(隨時以處中也)라! 그 변화를 인정하고, 그 변화에 맞춰 정확한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바로 시중이다.
여기서 수시(隨時)는 상황의 변화, 처중(處中)은 그 상황 분석에 따른 정확한 판단과 실행이다. 경영자는 상황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기초로 시간과 공간을 읽어내고,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물론 중용으로 하루를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적당한 시간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감정과 실천을 조절하며, 가족이나 직원과의 관계에서 정확한 ‘중(中)’을 찾아내는 것이 중용의 일상이다.
“천하 국가도 고르게 다스릴 수 있고, 높은 벼슬도 사양할 수 있고, 하얀 칼날도 밟을 수 있지만 중용만큼은 쉽지 않다(天下國家도 可均也요, 爵祿도 可辭也요, 白刃도 可蹈也나 中庸은 不可能也니라).”
공자는 중용적 삶의 어려움을 이렇게 강조한다.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도, 천하의 높은 자리를 사양할 수 있는 의리도, 시퍼런 칼날을 밟을 수 있는 용기도 중용보다는 쉽다는 뜻이다.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으며, 변화하는 상황을 정확히 읽어내고 처지를 명확히 파악해 역동적인 변화에 걸맞은 판단을 내리고, 지속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리더의 모습이 김연아의 연기처럼 우리를 감동시킨다.
박재희 민족문화컨텐츠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