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의 욕망을 깨우다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디자인의 힘은 어디에서 올까. 세계 100대 기업의 절반 가까운 기업들에 디자인 조언을 해주고 있는 정신분석학자 클로테르 라파유 씨는 “소비자들의 문화적 유전자 속에 각인된 원형을 건드리라”고 권한다.
최근 눈에 띄는 2가지 원형을 보자. 현재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 중인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전’ 포스터에 나오는 ‘유디트’와 유명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의 유품 경매에 나온 피터르 몬드리안(1872∼1944)의 작품이 그것들이다.
성경 속에서 유디트는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해 목을 베어 이스라엘을 구했다는 인물이다. 원화의 그림 오른쪽 하단에 절반쯤 보이는 것이 잘려진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다. 한 손에 잘린 적장의 머리를 든 끔찍한 광경이지만 표정에는 나른한 평온함이 있다. 관능의 유혹이 가져다 줄 치명적 위험을 경고하는 것 같기도 하다.
19세기 독일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헤벨은 유디트를 더 극적인 인물로 재창조했다. 적장을 사랑하지만 조국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을 견디지 못해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급기야 홀로페르네스를 죽이는 비극의 인물로 묘사한 것. 클림트가 그린 유디트는 광기에 빠져 욕정의 원인을 제거해 버리지만 죽는 날까지 이어질 끔찍한 죄책감과 회한을 피해 계속 착란 상태에 머무는 인간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유디트는 세례 요한의 목을 갖고 싶어 했던 무희 살로메와 더불어 대표적인 ‘팜 파탈’로 꼽힌다. 관능의 원형인 셈이다. 이 지독한 관능의 유혹이 갖고 있는 중층적 특징들, 예컨대 고혹적이면서 위험하고 노골적이면서 비밀스러운 유디트를 성공적으로 형상화한 예술가의 하나가 바로 클림트다.
내려 보는 듯한 유디트의 시선은 보는 이에게 “나의 세계로 다가오라”고 요구한다. 관람자들은 아무리 자리를 옮겨도 그녀의 시선을 피할 수 없다.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의 본능을 깨우라는 강요이고 반쯤 감은 눈은 그녀의 세계가 말똥말똥한 이성의 세계가 아닌 몽롱하고 나른한 감성의 세계임을 알려준다.
클림트가 형상화한 이 모습은 화랑을 찾은 관람객의 원형만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다. 디자이너들에 의해 재창조되어 거리 곳곳에서 소비자들 속에 잠들어 있는 원형을 자극한다. 예술과 산업의 접점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들에게 필요한 예술적 소양의 하나는 바로 이런 문화적 원형을 찾아내고 디자인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인문학적 통찰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현대의 소비자들이 구매하는 것은 제품의 기능이 아닌 이미지다. 이 이미지들은 예쁘다고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소비자들의 심리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원형을 담고 있어야 한다. 클림트가 형상화한 유디트는 달콤하면서 위험한 양가(兩價)적 유혹의 원형을 제시하고 있고 통찰력 있는 디자이너들은 이를 놓치지 않고 이용한 것이다.
예컨대 일본의 전통 있는 청주 겟케이칸(月桂冠)의 1930년대 광고에서 그림 속 모델은 유디트의 표정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하다. 니시오카 씨는 “이 광고 이미지가 건드린 것은 잃어버린 야성을 보완해줄 마력이 상품 속에 있다는 암시”라고 설명한다.
클림트가 팜 파탈의 원형을 표현했다면 몬드리안은 현대인들의 눈을 즐겁게 할 새로운 형과 색의 구성으로 관객들에게 모더니티의 원형을 제시했다. 신경미학자들 중에는 몬드리안의 수평, 수직선들이 인간의 시각정보 처리 특성과 여러모로 들어맞아 새로운 재미를 주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여럿 있다.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그의 색상은 회색 모노톤이 넘쳐나던 초기 산업사회 환경에 생기를 불어 넣는 한편 모든 색면을 빈틈없이 막아 버리는 검은 선들을 통해 현대인의 편집적 강박증을 달래줬다.
단적으로 말해 몬드리안의 그림은 많은 디자이너에게 모더니티의 한 원형을 제시한 셈이다. 지난해 작고한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과 데 스틸(신조형주의) 운동의 리더였던 네덜란드의 디자이너 헤릿 리트벨트(1888∼1964) 등이 그들이다.
지상현 한성대 교수·미디어디자인콘텐츠 학부 psyjee@hansu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