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남자가 지켜야 할 10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화장실에 들어가면서 바지 지퍼를 내리지 않는다. 둘째, 아가씨들이 ‘아저씨’라고 불러도 기분 나빠 하지 않는다. 셋째, 허리띠에 새 구멍 뚫지 않는다….”
정래은 현대오일뱅크 관리팀장이 발표를 하는 동안 회의석의 40대 중후반 팀장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자리에 앉은 정 팀장은 ‘한시름 덜었다’며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그가 발표한 유머가 재미가 없으면 ‘펭귄상’을 받아 망신을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열린 현대오일뱅크 경영지원본부 팀장 회의 풍경이다. 매주 월요일 신방호 부사장 주재로 부장급 팀장 18명이 참석하는 이 회의는 시작할 때 ‘당번 팀장’이 재미있는 얘깃거리를 발표해야 한다. 간부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보자는 취지다. 회사 안에서는 ‘오프닝 코멘트’라고 부르는 이 얘깃거리는 주로 유머나 연예가 정보, 명사의 명언 등이다.
이렇게 발표한 얘깃거리들은 즉석에서 팀장들의 반응을 보고 괜찮은 것들은 추려서 사내 인트라넷 게시판에도 올린다. 회사 전체로 공지되는 팀장들의 유머를 보고 직원들이 추가한 추천 댓글 수에 따라 그해의 최우수 오프닝 코멘트를 뽑아 연말 팀장 송년회 때 시상식도 갖는다. 부상은 크지 않은 액수의 백화점 상품권이라고. 반면 회의 자리에서조차 “이번 건 재미없다”는 반응이 나오면 문제의 유머를 발표한 팀장은 앞으로 분발하라는 의미로 즉석에서 ‘펭귄상’을 받는다.
지난해 최우수 오프닝 코멘트 상을 받은 사람은 방송인 김제동 씨의 재치 있는 말들을 모아 발표한 민병준 법무팀장. 2007년에는 바쁘고 피곤하다는 아버지에게 10달러(약 1만3300원)를 주면서 “제게 시간을 내 주세요”라고 말했다는 어느 아들의 얘기를 한 이정현 에너지환경정책팀장이 상을 받았다.
팀장 회의에 참석하는 김성용 현대오일뱅크 홍보팀장은 “오프닝 코멘트의 전통이 정확히 언제 생겼는지 잘 모르겠다”며 “2005년경부터 생긴 것 같은데 이제는 이름의 가나다순으로 당번을 정할 정도로 공식화됐다”고 설명했다. 빔 프로젝터를 이용하거나 음악을 활용한 ‘적극파’가 있었는가 하면 꼭 유머를 발표해야 한다는 법은 없기 때문에 법정계량단위 사용 의무화 같은 딱딱한 주제를 선택한 팀장도 있었다. 현대오일뱅크의 한 팀장은 “주로 중년들이 많기 때문에 유머가 다소 ‘노땅’ 느낌이 나는 것도 사실”이라며 “회의석상에서는 골프에 대한 얘기가 반응이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