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에서 828년 장보고가 신라 흥덕왕에게 청해진 설치를 요청하는 대목이다. 얼마 전 한국과 유럽연합(EU)이 자유무역협정(FTA) 최종 타결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문득 이 구절이 떠올랐다.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FTA가 장보고의 해상제국 구도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청해진을 설치한 장보고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당나라와 일본의 3국을 잇는 동북아시아의 해상 무역왕국을 탄생시켰다. 한-EU FTA가 타결되면 현시점에서 장보고의 무역왕국이 재현될 수도 있다. 한국에서 동쪽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한국은 이미 2007년 태평양 너머 미국과 FTA를 타결지었다. 서쪽으로 시선을 던지면 중국과 러시아 건너편에 유럽이 다가온다. 한-EU FTA가 타결되고 한미 FTA가 비준돼 발효되면 1100여 년 전 장보고가 이룬 무역왕국의 확대판이 형성되는 셈이다. 한-EU FTA 타결이 한미 FTA의 비준에 추진력을 줄 수 있다고 하니 한국이 지구촌 양대 경제권과 FTA로 어깨를 나란히 할 날이 머지않았다.
한국의 강역(疆域), 즉 국토가 한반도로 축소된 시기는 20세기 초였다. 청과 일본은 1909년 간도협약으로 조선인들이 사실상 점유하던 간도와 연해주를 빼앗아갔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이제 물리적인 강역의 회복은 기대하기 힘들게 됐다. 고토(古土) 회복의 꿈과 의지를 품는 일이야 가상하다고 해도 실현 가능성은 별개의 문제다. 그러나 FTA는 강역을 넓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 한미, 한-EU는 물론이고 정부가 추진하는 동시다발적인 FTA 협상이 하나 둘 성사되면 우리는 한반도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세계를 무대로 활약할 기회를 얻게 된다. 장보고가 자력으로 무역왕국을 건설했다면 지금은 국가 간 협상으로 무역 영토가 넓어지는 점이 다를 뿐이다. 박양호 국토연구원장은 ‘연성(軟性) 국토’라는 관점으로 FTA를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그는 “FTA는 자유로운 글로벌 교역 투자 교류가 이뤄지는 국제경제권으로 국토 개념을 확대하는 기초가 된다”고 강조했다.
한-EU FTA든, 한미 FTA든 한국이 얻을 이점이 많다. 정부가 한국을 아시아 FTA의 허브로 만들겠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한-EU FTA가 발효되면 많게는 60만 개에 가까운 일자리가 생길 것이라는 연구가 있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이 3% 넘게 증가한다는 낙관적 예상도 나온다. 하지만 이는 수많은 가정을 전제로 산출한 수치에 불과하다. 경제주체들이 연성 국토를 넓히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할 때만 이 수치들이 현실이 된다. 그 옛날 장보고가 그랬듯이.
이진 경제부 차장 lee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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