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254m 선체, 파도 쳐도 요지부동

  • 입력 2009년 4월 17일 02시 56분


10개국 기술자 100명 북적

중앙통제실은 작은 지구촌

핵심장비 아직 수입 씁쓸

13일 오전 경남 거제도 앞 13km 해상.

기자가 탄 중형 바지선이 파도를 헤치고 운항한 지 약 30분 만에 길이 254m, 폭 38m, 높이 127m에 이르는 거대한 선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배는 대우조선해양이 최근 건조를 마치고 발주사에 인도하기에 앞서 시운전에 나선 ‘드릴십’ 2호기.

드릴십은 대형 선박에 원유 시추장비(드릴)를 올린 것으로 국내 조선업체들이 수주량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는 첨단 해양 플랜트다. 불황 속에서도 글로벌 경쟁력으로 한국 경제의 희망이 되고 있는 조선산업의 역동적인 수출현장을 다녀왔다.

○드릴십 안은 ‘소(小) 지구촌’

사다리를 타고 드릴십 갑판에 오르자 메스껍던 속이 갑자기 진정됐다. 파도에 출렁이던 바지선과 달리 드릴십은 별 흔들림이 없어 마치 육지에 오른 듯한 느낌을 줬다. 선체 밑바닥에 달린 6개의 추진기(thruster) 프로펠러가 파도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물살을 뿜어내 흔들림을 최소화한 것. 원유 시추 단계에서 선체가 파도에 흔들리면 자칫 해저와 연결된 시추관이 파괴돼 원유 유출에 따른 해양오염이나 대형화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갑판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있는 중앙통제실 ‘휠 하우스(wheel house)’로 들어가 보니 선실마다 외국인 엔지니어가 북적거려 ‘멜팅팟(인종의 용광로)’이 따로 없었다. 현재 드릴십에서 상주하고 있는 외국인 엔지니어는 전체 인원의 절반인 100여 명에 달한다. 이들은 발주사인 트랜스오션(미국)을 비롯해 납품업체인 지멘스(독일)와 콩스버그(노르웨이) 등 10개국 30개사에서 파견돼 자신들이 공급한 설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1970년대 초반 조선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지 30여 년 만에 국내 조선업체가 굴지의 글로벌 기업들을 협력사로 거느리게 된 것이다. ○핵심설비 아직 외국인 손에

이번에 대우조선해양이 처음 제작한 드릴십은 2006년 수주한 6척 가운데 하나로 계약금액은 총 30억 달러(약 4조300억 원)에 이른다. 발주사의 까다로운 요구에 따라 드릴십에는 각종 최첨단 장비가 빼곡히 들어섰다.

유정분출방지(BOP) 시스템 통제실에선 이 분야 세계 1위 기업인 미국 하이드릴의 직원 후안 씨(28)가 한창 통신패널 테스트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BOP는 시추관 주변 온도나 수압이 급상승해 선체가 위험해질 경우 원유가 새지 않도록 시추관을 봉합한 뒤 이를 잘라내는 장비”라고 소개했다. 대우조선해양에 따르면 하이드릴은 BOP 장비 납품대가로 총 1억 달러를 받았다. BOP뿐만 아니라 첨단기술이 사용되는 각종 해저 장비 상당수는 아직 국산화가 안돼 국내 조선업체들의 분발이 필요한 부분으로 지적된다.

BOP 통제실에서 나와 갑판으로 나가려는데 안내를 맡은 해양생산2팀 김창연 차장이 기자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지금껏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자동전력제어(SIP-link) 시스템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사다리를 타고 한참을 내려간 전력실에는 대형 전산실을 방불케 하는 전력제어 장비가 가득했다. 지멘스와 함께 개발한 SIP링크는 정전 복구시간을 기존의 40초대에서 15초대로 대폭 줄인 핵심설비다. 드릴십은 정전시간이 길어지면 추진기가 꺼져 시추관이 파손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시추관은 일단 파손되면 유정 복구에만 6개월이 소요돼 상당한 손실이 불가피하다.

김 차장은 “해외 유수 업체들과 각종 첨단설비를 만들면서 어깨너머로 그들의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며 “드릴십 위에서 지내느라 몇 달간 가족 얼굴을 못 봤지만 세계 최고의 배를 건조했다는 자부심에 기쁘다”고 말했다.

거제=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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