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충성도가 가장 높은 액정표시장치(LCD) TV’(브랜드키즈·2008년), ‘100달러를 더 낼 만한 가치가 있는 제품’(TFC인포·2008년), ‘화질 편의성 음질 부가기능 최고 점수’(컨슈머리포트 올해 3월호). 삼성전자 TV에 최근 쏟아진 해외의 찬사들이다. 삼성전자의 TV는 2006년 이후 3년간 세계 시장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삼성전자 TV는 사실 한국 경제가 심한 불황에 휩싸여 있던 시절에 태어났다. 그래서 더 값진 성공사례다.
○ 역발상… 불황에 고가(高價) TV를 내놓다
‘높이 168cm로 웬만한 성인의 키와 맞먹는 TV. 크기도 크기지만 가격표를 보면 더욱 놀란다. 소형 승용차보다 비싼 758만 원. 삼성전자가 10일 본격적으로 판매에 들어간 프로젝션 TV 파브 61인치급 모델은 국내에서 판매되는 가전제품 가운데 가장 비싼 제품이다.’(본보 1999년 2월 10일자)
파브(PAVV) 브랜드가 첫선을 보이던 무렵은 외환위기로 국내 내수 경기가 꽁꽁 얼어붙었던 시절. 소형차 값보다 비싼 프로젝션TV는 곧 부(富)의 상징이었다.
파브는 국내 가전업계가 본격적으로 선보인 최초의 프리미엄 TV로 꼽힌다. 삼성전자의 경우 1994년 ‘명품 TV’를 선보였지만 여전히 20인치급이었다. 국내에서 판매되는 가전제품을 통틀어 가장 비싼 TV를 내놓으면 시장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삼성전자로선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는 디지털 TV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점이 1999년 5월로 이미 못 박혀 있던 시점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디지털 TV는 영상제품의 대형화와 고급화를 이끌어낼 결정적인 계기가 될 것이 분명했다. 대형 고급 TV 시장은 외산 브랜드가 꽉 잡고 있던 상황에서 한번 밀리면 앞으로 영영 시장을 되찾아올 수 없을 것이었다.
당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삼성전자 김재인 마케팅팀 부장은 “불황이었지만 고급 가전제품에 대한 수요가 분명히 있다고 판단했다”며 “영상제품군의 최고급인 프로젝션 TV 시장을 그대로 외산 브랜드에 넘겨줄 수는 없다는 비장한 각오였다”고 회고했다.
제일기획은 최근 내놓은 ‘불황 3훈(訓)’ 보고서에서 불황기의 소비가 실속 혹은 프리미엄으로 극단적으로 나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파브는 불황기의 프리미엄 시장을 겨냥한 대표적인 성공사례다.
○ ‘삼성’ 떼고 출발
기술력은 외산에 비해 모자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이미 시장에서는 ‘고급 프로젝션 TV=외국산’이라는 공식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다. 결국 삼성전자는 ‘삼성’이라는 회사명을 떼어내고 완전히 새롭고 독자적인 프리미엄 브랜드를 내놓기로 결정한다.
‘PAVV’는 ‘Powerful Audio & Vast Vision(강력한 음향과 넓은 시야)’의 약자. 파브와 함께 경쟁을 벌인 브랜드 네임은 무려 100여 개. 그중 심사를 거쳐 5개가 후보로 올랐다. 스펙터스(Spectus), 트라움(Traum), 크라톤(Craton), 빅(VIC) 등이 그들이다. 이 가운데 파브와 트라움이 최종 경합을 벌였다. 결국 파브가 세련되고 현대적인 느낌이라는 평가를 받아 최종 선정됐다. 독일어로 ‘꿈’을 뜻하는 트라움은 클래식, 품위, 스케일 등의 느낌을 준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발음이 어렵고 이미지가 평범해 보인다는 점이 지적돼 탈락했다.
이후 삼성전자는 ‘파브’를 알리는 데 온 힘을 쏟았다. 1999년 1월 ‘대화면 고화질-파브 리얼리즘’이라는 콘셉트를 내걸고 열대어를 소재로 한 인쇄광고를 시작했다. 불황기에는 다들 광고비를 줄인다. 따라서 남들보다 조금만 더 광고를 해도 훨씬 돋보인다. 파브는 일본 소니 등이 100% 가까이 장악하고 있던 프로젝션 TV 시장에 뛰어든 지 1년여 만에 시장점유율을 50%로 끌어올리며 1위에 올랐다.
○ “100달러 더 주고라도 사겠다”
파브의 성공은 단지 치밀한 마케팅 전략 덕분만은 아니다. 탄탄한 기술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삼성전자는 1996년 자연색에 가까운 화질을 구현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6년 뒤인 2002년 ‘DNIe(Digital Natural Image engine)’라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 2005년에는 밝은 곳에서도 빛이 반사되지 않아 또렷하게 볼 수 있는 ‘데이라이트(Daylight)’ 기술을 개발하며 경쟁자들보다 한발 앞서 나갔다. 삼성전자 TV의 장점으로 탁월한 화질을 꼽는 고객들이 많은 것은 이런 노력 덕분이다.
지난해 미국 시장조사기관 ‘TFC인포’의 LCD TV 브랜드 선호도 조사는 삼성전자 브랜드의 가치를 수치로 보여준다. 삼성 LCD TV에 대해 같은 사양의 타사 제품에 비해 100달러 이상의 ‘브랜드 프리미엄’을 지불할 의사가 있다고 밝힌 소비자가 82.6%로 조사 대상 제품 가운데 가장 많았다. 또 150달러 이상을 내겠다는 응답도 56%였고 돈을 더 낼 수 없다는 응답은 제로(0)였다.
같은 시기 미국의 브랜드 조사기관 ‘브랜드키즈’의 조사 결과도 비슷하다. 삼성전자 TV는 플라스마디스플레이패널(PDP)과 LCD TV 분야에서 모두 고객 충성도가 가장 높은 브랜드 1위로 선정됐다.
올해는 발광다이오드(LED) TV가 본격적으로 출시되는 원년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파브로 시작된 삼성전자 프리미엄 TV가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맞았다.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 ‘크리스털 로즈’ 디자인의 산파 이상훈 상무
“車전시장서 투명부품 보고 바로 저거구나 싶었죠”
크리스털 로즈 디자인은 어떤 배경,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일까. ‘이중사출’ 기술을 개발해 이 디자인을 현실화한 삼성전자 DMC(완제품)부문 이상훈 상무(사진)를 통해 궁금증을 풀어봤다. 이 상무는 그 공로로 지난해 ‘자랑스러운 삼성인상’을 수상했고, 올 1월에는 임원으로 승진했다.
“유럽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서 투명과 불투명으로 만들어진 자동차 부품이 눈에 띄었습니다. 저거다 싶었죠. TV 디자인에 ‘투명’을 적용해 보자는 발상의 전환에서 탄생한 것이 크리스털 로즈 디자인입니다.”
삼성은 2004년 고광택 피아노블랙을 TV 베젤(테두리)에 채용해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경쟁사들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비슷한 디자인을 내놓았다. 누가 먼저냐는 것은 소모적 논쟁에 불과했다.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목표를 한 단계 높일 수밖에 없었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디자인에 한 가지를 더했다. 남들이 흉내 낼 수 없는 독자적 기술을 통한 차별화였다.
이중사출은 특정제품의 외관을 만들기 위해 두 가지 재질이나 빛깔의 플라스틱을 맞대어 성형하는 기술이다. 이 상무는 “디자인 기획 당시 금형이나 사출, 사출기계 등에 대한 기본지식조차 갖추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로 ‘맨땅에 헤딩’이라는 표현이 딱 맞았다. 어렵사리 선행기술을 확보하고도 양산까지는 수많은 난관이 남아 있었다. 그는 “크리스털 로즈 디자인과 관련한 모든 설비 및 기술을 전 해외법인에 동시다발적으로 확산해야 했다”며 “적기에 신제품을 내놓기 위해 모든 개발자가 ‘시간과의 싸움’에 매달렸다”고 회고했다. 이 상무는 지금도 해외출장이 무척 잦다. 해외 생산법인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열 일을 제쳐두고 달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과 유럽, 중국의 TV 제조업체들도 최근 심심찮게 크리스털 로즈 디자인과 비슷한 형태의 제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올 1월 ‘CES 2009’에서도 유사 제품들이 다수 등장했다. 이 상무는 “경쟁업체들이 크리스털 로즈를 모방해 실제 시장에서 판매하기도 하는데 대부분 도장을 하거나 별도 부품을 붙인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은 크리스털 로즈 TV 시리즈의 대박 행진에 힘입어 지난해 세계 액정표시장치(LCD) TV 시장에서 처음으로 점유율 20%를 넘어섰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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